이들의 생명은 부수적 피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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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숫자처럼 일상화돼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훈 작가는 2019년 9월 24일 서울 마포구 다리소극장에서 열린 <김용균이라는 빛> 북 콘서트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했습니다.

[취재 후]이들의 생명은 부수적 피해가 아닙니다

주간경향은 지난호 표지 이야기에서 ‘재난 불평등’ 문제를 다뤘습니다. “누군가에겐 외제차가 침수되는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겐 목숨을 잃는 재난”(정록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장)이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기사를 준비하면서 김훈 작가의 낭독 내용과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언급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개념이 포개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우만은 2011년 출간한 <부수적 피해>에서 군사행동 시 민간인 피해를 이르는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를 확장해 지구화 시대의 불평등을 진단했습니다. 바우만은 2005년 미국 루이지애나 해안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가난한 흑인들이 부수적 피해자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선 매년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사고·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사망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김훈 작가의 말대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의 산재 사망을 부수적 피해로 여겼습니다.

기후재난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가난한 사람들과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명은 부수적 피해가 아닙니다. 바우만의 지적처럼 사회 불평등이 ‘부수적’이라는 용어에 가려져 그 본질이 희석되고 있을 뿐입니다.

김용균씨 사망 이후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것처럼 기후재난이 유독 사회적 약자만 집어삼키는 사회구조를 바꾸는 게 필요합니다. ‘뉴올리언스지수’가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지수는 2005년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뒤 도시 재생 과정을 주기적으로 추적하는 지표입니다. 주거, 고용, 임금 등 다양한 정보로 구성돼 있습니다. “복구는 재건축한 건물의 숫자로는 제대로 측정할 수 없으며, 생활이 복구된 주민의 수로 살펴야 한다.”(존 C. 머터, <재난 불평등>) 한국사회에서도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사회적 피해’가 회복되는지 지속적으로 추적하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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