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다시는 펼쳐보지 못한 그날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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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황해도 용연읍 용정리 바닷가 외딴집.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김주삼은 어머니와 동생 4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동급생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용정제1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읍내 병원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다. 1956년 10월 10일 그날 밤에도 김주삼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 피해자 김주삼씨(85)가 지난 8월 1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사건 이후 66년 만에 직접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최규화 제공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 피해자 김주삼씨(85)가 지난 8월 1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사건 이후 66년 만에 직접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최규화 제공

같은 시각 백령도에서는 남한의 북파공작원 3명이 조용히 공작선에 오르고 있었다.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그들은 소형 목선인 ‘뗏마’로 갈아탔다. 어느 해변에 배를 대자, 불 켜진 작은 집 한채가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여 집으로 다가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바로 김주삼이 있었다. 그들은 김주삼에게 총을 겨누고 말했다.

“남조선 무장대가 오늘 침투한다는 연락을 받고 왔다. 네가 동네 지리를 안내해라.”

남한 군인에게 납치된 북한 중학생

열아홉 살 김주삼은 어린 여동생들의 얼굴부터 떠올렸다. 동생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한 그는 순순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김주삼의 방을 살펴보던 남자들은 ‘교과서’ 몇권을 챙겼다. 그리고 김주삼을 데리고 집을 나서서 다시 배를 타고 백령도로 돌아왔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인천에서는 자동차로 서울 오류동까지 왔다. 도착한 곳은 공군 첩보부대였다. 군인들은 김주삼에게 인민군 부대 위치나 동향 등 군사정보를 캐물었다. 바닷가 외딴집에 사는 중학생이 그런 정보를 알 턱이 없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소득이 없자, 내가 사는 마을 근처에 다리가 몇개인지, 학교는 어디에 있는지, 논밭은 어디에 있는지, 산세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조리 그리라고 했다. 조사자 마음에 안 들면 계속 퇴짜를 맞으며 쥐어짜기 식으로 한 달간 조사를 받았다.”(‘시사IN’ ‘납치 소년 김주삼의 60년 망향가’ 정희상 기자, 2022. 8. 11.)

국군과 미군 첩보대를 오가며 조사가 계속됐다. 김주삼은 조사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여기고 두려움의 시간을 버텼다. 그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조사를 마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노역’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약 4년이나 이어졌다.

김주삼은 부대 내 수송부에서 차량 수리 일을 돕고 잡다한 심부름을 했다. 밤에는 부대원들의 막사 안에서 같이 잤다. 당시 부대원 임중철(89)은 김주삼의 모습을 기억했다.

“밤에 자다가 이놈(김주삼)이 혼자 살살 기어나와. 뭐 하나 보면 북쪽에다 대고서, 철망을 붙잡고서 소리 안 나게 우는 거야. 그거 내가 여러 번 봤어요. 항상 고향 생각하고, 형제 생각해서 그러는지,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어.”(2022. 8. 10. 임중철 인터뷰)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했다. 그사이 부대 주소를 등록기준지로 해서 호적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1961년쯤 “4년 동안 겪은 일을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줄 알라”(‘시사IN’, 2022. 8. 11.)는 협박과 함께 혈혈단신 부대 밖으로 내보내졌다.

부대 근처 면도날 공장에 취업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과거 그를 불쌍히 여기던 부대원들의 도움으로 몇차례 일자리를 얻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돈도, 기술도, 학벌도, 인맥도 없이 홀로 맞닥뜨린 막막한 삶. 김주삼은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가난만큼 그를 괴롭힌 것은 정부의 감시와 사찰이었다. 정부는 그것을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보호’와 ‘관리’라 여겼겠지만, 김주삼에게 그것은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부대를 나온 뒤) 처음에는 하우스에 살았어요. 비닐하우스. 거기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 어떤 형사는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다 훑어보고 그랬거든.”(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이제 김주삼이 대한민국에 묻는다

가난과 싸우고, 차별과 의심의 시선과 싸우고,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싸우는 동안 세월은 잔인하게도 흘렀다. 80대 노인이 된 김주삼에겐 죽기 전에 꼭 물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2020년 2월, 김주삼은 대한민국에 물었다. 엉망이 돼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한민국의 책임은 없느냐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접수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8월 9일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했다.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 조치와 함께 가족 상봉 기회를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진실규명의 결정적 근거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의 보상금 신청 기록’이었다. 김주삼을 납치한 북파공작원들은 2008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상금을 받았다. 또한 2012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재조사 과정에서 ‘납치 피해자’ 김주삼의 진술을 확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김주삼의 존재를 증거 삼아 보상금을 지급한 것이다. 이미 그때 김주삼의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정부는 10년이 더 지나도록 김주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연락만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게 어디 있어? 지금도 밤을 꼬박 새울 때가 있어요. (가족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밤을 꼬박 새워요.”(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66년 전 그날, 북파공작원들은 김주삼의 집에서 교과서를 몇권 챙겨갔다. 하지만 그날 이후 김주삼은 다시는 교과서를 펼쳐보지 못했다. 빼앗긴 시간, 어긋난 세월을 어디서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이제 대한민국이 김주삼의 오래된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다.

“뼈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대한민국에 와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도 못 들어갔어. (못 배워서) 먹고사는 데 그렇게 힘이 드니까 그게 제일 어려웠지.”(2022. 8. 10. 김주삼 인터뷰)

※‘공군 첩보대의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은

1956년 첩보 활동을 명목으로 북한 민간인을 무단으로 납치해 정보를 취득한 후, 필요성이 없어진 대상자를 첩보부대에서 무보수로 노역을 시키고 북한으로 돌아갈 권리도 부정하고 남한에 평생 억류한 사건이다.

<최규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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