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500년 전 고인돌을 ‘잡석’ 취급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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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유산과 관련해 모종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2006년 경남 김해 구산동 택지개발사업을 벌이던 중에 윗돌의 무게가 350t이나 되는 고인돌을 확인하죠. 김해시가 급기야 2020년 예산 16억여원을 확보, 고인돌 정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강원 춘천 중도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유구. 총 150기의 다양한 고인돌이 집중 출토됐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강원 춘천 중도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유구. 총 150기의 다양한 고인돌이 집중 출토됐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의욕 과잉과 무지의 소치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인돌을 제대로 복원하겠다면서 박석(薄石)을 빼내 세척하고 강화처리 후 다시 박아넣었다는 겁니다. 박석은 ‘얇고 넓적한 돌’입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무덤의 묘역을 표시하려고 이런 돌을 깔아놓은 겁니다. 이 박석 밑에는 문화유물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구산동 고인돌’은 도(경남) 지정문화재여서 유적 및 유구에 손을 대려면 경남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김해시가 ‘박석은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정비계획을 승인한 도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무시하고 박석을 들어낸 겁니다. 매장문화재법 제31조 제2항은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내에서 현상을 변경할 경우에는 별도의 문화재 보호대책 수립과 그에 따른 조사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10년 이하의 징역과 1억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습니다.

이에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현장조사를 벌였는데요. 김해시가 당초 수작업으로 돌을 빼냈다고 해명했지만, 중장비까지 동원한 정황이 드러났답니다. 그 과정에서 문화층이 파괴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 사건을 정리해볼까요. 예산을 확보한 김해시가 유적공원 정비계획을 밀어붙이다가 빚은 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의욕 과잉과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도식 토기’의 발견 이번 사건은 지금부터 언급할 ‘참사’에 견주면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지난 5월에 레고랜드가 들어선 강원 춘천 중도 유적을 말하는 건데요. 레고랜드란 블록장난감(레고)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사업이죠. 2011년부터 추진됐고요. 중도에 테마파크니 뭐니 하는 놀이동산을 짓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습니다. 중도는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원래 육지였는데 의암댐 건설(1967)로 수몰되고 남은 땅이 섬으로 변한 겁니다.

청동기 마을 영역 안에 조성된 고인돌군. 청동기 마을의 공동묘지로 해석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동기 마을 영역 안에 조성된 고인돌군. 청동기 마을의 공동묘지로 해석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7년 중도 지표조사에 나선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심상찮은 유물을 확인했습니다. 무늬가 없는 단단한 토기, 즉 경질무문토기 조각이 무수히 박혀 있었던 겁니다. 이런 토기들은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중도에서 확인된 경질무문토기는 ‘중도식 토기’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중도에서 ‘안정적으로’ 확인된 원삼국시대(기원 전후~3세기 사이의 고고학 시대구분)의 표지유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죠. 이때 천추의 한을 남겼죠. 중요한 청동기 시대 표지유물이 나온 중도를 ‘사적’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로 묶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겁니다.

유구 3000여기, 유물 8000여점의 보고 그후 30여년이 지난 2013년 레고랜드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에서 기어코 일이 터집니다. 무려 1400여기의 청동기 유구가 쏟아져 나온 겁니다. 고인돌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 마을 방어용 도랑(환호) 등. 집터에서는 ‘둥근 바닥 바리 모양 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가 확인됐는데요. 이 유적의 연대가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4~12세기)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유물이죠.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출토됐습니다. 마을을 보호하는 도랑(환호·404m)과 경작 유구까지 확인됐습니다. 조사가 끝난 2017년까지 7개 기관이 구역을 나눠 맡아 진행한 발굴의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신석기 유구 8기와 청동기 도랑·집터·구덩이·무덤 등 2205기, 철기~원삼국 유구 772기, 삼국 및 삼국 이후 유구 65기, 고려~조선 유구 20기, 시대 미상 20기 등 모두 3090기의 유구가 조사됐습니다. 출토 유물도 8028건(8079점)에 달했습니다. 2020년 7개 발굴기관이 자그마치 24권 1만2000쪽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종합보고서를 펴냈답니다. 그만큼 엄청난 유적이었던 겁니다.

소박한 고인돌의 정체 그중 중도 유적의 ‘시그니처’는 다양한 형태로 줄지어 있는 고인돌이었습니다. 중도의 고인돌은 흔히 알려진 대규모의 탁자식(북방식)이나 바둑판식(남방식)은 아닙니다. 많은 돌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 그 한가운데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한 ‘소박한’ 고인돌이었습니다.

사실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고인돌(약 4만기) 중 90% 정도가 중도에서 발견된 것 같은 고인돌입니다. 큰 규모의 탁자식·바둑판식 고인돌은 고을의 최상위 지도자 무덤 혹은 제사용이거나, ‘랜드마크’ 같은 마을의 상징물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중도에서 확인된 ‘소박한’ 고인돌은 어떨까요. 역시 나름 이 마을에서 행세깨나 했던 가문의 무덤일 수 있어요. 어떻든 간에 실제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실용적이면서 대중적인 무덤이었을 겁니다. 3열로 40여기가 200m 길게 조성된 고인돌군(群)도 있는데요.

고인돌 자체가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합니다. 그 가운데는 5~6세의 어린아이가 구부린 자세로 묻힌 작은 고인돌도 보였습니다.

청동기 시대 아파트 평형 집터는 어떨까요. 기원전 14~12세기쯤 조성된 집터는 요즘 아파트의 평수와도 뒤질 게 없는 26평(86.5㎡)에 달했습니다. 126㎡(38평)와 154㎡(47평) 집터도 보였는데요. 25~26평, 38평형, 47~48평형 등은 요즘도 기준으로 삼는 아파트의 평형이잖아요.

26평형 집터의 경우 벽체 혹은 천장이 불에 타면서 그대로 무너져 버린 통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때 무너진 그대로 3200~3400년간 보존돼온 겁니다. 유물이 1점도 발견되지 않은 불탄 집터도 있었는데요. 재미있는 해석이 있더라고요. 이 집 주인이 이사하면서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옛집을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닐까, 뭐 이런 고고학적 상상입니다.

또 하나 중도에서는 기원전 11~9세기, 기원전 5~2세기 사이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중도의 건너편인 현암리와 천전리·신매리에서는 그런 공백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기에 중도 주민들이 보따리를 싸서 주변 마을로 이사한 걸까요.

또 조사된 집터(1373기) 중 3분의 2 정도가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로 편년되는데요.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1가구당 5~6명 살았다고 치면 6000~70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정도면 중도는 ‘청동기 나라의 도성’을 방불케 하는 유적인 셈이죠.

화재로 매몰된 그대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집터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화재로 매몰된 그대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집터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플라스틱 장난감 공원 조성계획 이 정도면 레고랜드 유치계획을 초기 단계에서 바꿔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공원 말고, 세계적인 청동기 유적공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레고랜드를 유치한 당시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물론이고요. 2013년 7월 중도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레고랜드 사업을 ‘5대 현장대기 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독려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개발계획을 밀어붙인 겁니다.

새로운 논리가 등장했습니다. ‘보존과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윈윈 전략’을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작정 보존만 외칠 게 아니라 활용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름 일리 있는 논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청동기 유적 6만1500㎡와 철기~삼국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습니다. 레고랜드 안에 청동기 및 원삼국 유적공원을 조성하고, 조사된 유구들을 옮겨 보존·전시하는 별도의 전시관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었을까요.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엄청난 규모의 집터와 경작유구 등은 매립·복토됐고요. 고인돌(지석묘) 150기 중 100여기도 역시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3400년 전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위에 서양의 플라스틱 놀이공원을 조성한 셈이 됐습니다.

고인돌은 잡석? 더 큰 문제는 이전 복원, 혹은 이전 전시하겠다면서 일단 해체해버린 고인돌 48기(이전 복원 대상 36기, 이전 전시 대상 12기)입니다. 철거한 48기의 고인돌은 검은 비닐 안에 넣어 ‘잡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닐하우스에 야적해놓았는데요.

한가운데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한 춘천 중도 고인돌.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 무덤 위에 상석을 올린, 상당히 ‘소박한’ 고인돌이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한가운데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한 춘천 중도 고인돌.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 무덤 위에 상석을 올린, 상당히 ‘소박한’ 고인돌이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지금까지 8년째 임시 보관돼 있다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기야 돌이 고인돌(지석묘)일 때야 가치 있는 유구죠. 해체되는 그 순간부터는 쓸모없는 ‘잡석’으로 전락합니다. 유적·유구는 원래의 자리에서 보존돼야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게 되니까요.

2000~4500년 전 조성된 중도 유적을 까부수고(발굴 자체가 훼손이니까) 그 위에 플라스틱 놀이공원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죠. 그것도 확인된 유구(3000여기) 가운데 유적공원으로 이전 복원되는 것은 100분의 1도 안 되는 고인돌 36기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기가 찬데 레고랜드가 정식개장(5월 5일)했습니다. 유적공원 및 전시관 조성, 유적 이전 보존 계획은 어찌 됐습니까. 공사비가 부족하네, 뭐네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이랍니다. 일단 개장했으니, 상황 끝인데 답답할 게 없다는 이야기겠죠.

그 사이 고인돌은 비닐하우스 안에 ‘잡석’이라는 이름으로 놓여 있을 수밖에 없겠죠.

호미로 막을 일이었는데…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고고학계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1970~1980년대 이른바 ‘중도식 토기’를 발굴해놓고도 문화재 지정 없이 넘긴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당시 학계에 우선 원죄를 묻고 싶고요.

그와 함께 청동기 유구가 쏟아져 나온 레고랜드 사업 초기(2013)에 전체 보존 결정을 내렸다면 어땠을까요. 아쉬움이 큽니다.

레고랜드 예정부지에서 청동기 유구가 쏟아지자 ‘개발과 보존 및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 환호(도랑) 지역 6만1500㎡와 철기~삼국시대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레고랜드 예정부지에서 청동기 유구가 쏟아지자 ‘개발과 보존 및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 환호(도랑) 지역 6만1500㎡와 철기~삼국시대 유적 3만2000㎡만 보존키로 했다. / 춘천 중도동유적 연합발굴조사단의 ‘춘천 중도동 유적 발굴조사 통합보고서’ 2020

강원도와 정부가 적극 나선 사업이고, 또한 수천억원이 투입되는 판이니 중간에 ‘전면 보존’의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추진한 강원도는 “모든 사업 과정은 일일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진행됐다”고 강조했는데요.

그러니까 오히려 고고학계 연구자들이 결과적으로는 레고랜드 사업의 방관자 내지는 조력자가 된 겁니다. 필자와 같은 언론의 책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도 관련 기사를 한두 번 썼는데요. 강원도와 정부는 물론이고, 여기에 학계까지 미온적이니 ‘달걀로 바위치기’의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다 가만있지는 않았습니다. 풍납토성 발견과 보존에 공을 세운 이형구 교수 등이 적극 나섰는데요. 이 교수는 2015년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비로 펴낸 <중도유적 보존을 위한 백서>를 제출했고요.

일본 요시노가리와 중국 뉴허량 유적 그런 이 교수가 모델로 삼는 해외 유적이 둘 있더라고요. 하나는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입니다. 일본 규슈(九州) 북부지역인 사가현(佐賀縣) 간사키(神岐)에서 확인된 유적인데요. 이곳이 워낙 낙후지역이어서 공업단지 조성공사가 계획됐고요. 발굴 결과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유구 3000여기가 쏟아졌습니다.

사가현은 “이미 수천억원이 투입됐으니 개발을 멈출 수는 없다”면서 공사를 강행했는데요. 시민단체가 일어났고, 언론이 나섰으며 일본 문화청까지 호응하자 사가현도 입장을 바꿨습니다. 공단조성을 포기하고 유적의 전면 보존 및 복원을 결정한 겁니다. 불과 며칠 뒤면 불도저로 파괴될 운명이던 요시노가리 유적이 극적으로 보존됐습니다. 요시노가리는 한해 70만명이 찾아오는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 됐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인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의 뉴허량(牛河梁)은 어떨까요. 훙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시기의 석관묘, 석곽묘, 적석총, 적석 제단 등으로 구성된 유적인데요. 중국 정부가 2013년부터 1700억원을 들여 대형 유리 돔(Dome)을 씌운 유적 보존관을 조성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김해 구산동 현장 사진에서 보인 굴착기에서 춘천 중도 유적에 나타났던 다른 굴착기를 떠올렸습니다.

불법으로 손을 댄 구산동의 사례도 물론 잘못된 일이죠. 그렇다면 멀쩡한 고인돌을 ‘잡석’으로 처리해버린 춘천 중도의 일은 괜찮다는 겁니까. 법을 다 지켰다는 이유로요? 저라도 고개를 박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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