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훈민정음 혜례본> ‘상주본’의 가치는 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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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무더위에 답답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죠.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팀이 지난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의 강제회수를 위해 불법소장자인 배익기씨의 집과 사무실, 지인의 다방 금고 등 3곳을 수색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데요. 단속반은 “유력한 제보전화를 받고 한층 기대를 안고 수색했는데 ‘상주본’은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집이나 사무실 등 본인의 통제가 가능한 곳에 숨겨 놓았을 것 같은데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는 겁니다. 2015년 배씨 집에 난 화재로 불에 그을린 ‘상주본’ 일부가 공개(2017)된 이후 5년 이상 행방이 묘연한데요. 제대로 남아 있기는 한지 어떤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정말 속 터져 죽을 노릇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해례’ 부분.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풀이한 글이다. /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해례’ 부분.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풀이한 글이다. / 간송미술관 소장

1조원 가치라고… 이즈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배익기씨는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 이상이라 했으니 그중 10%인 1000억원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해왔는데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대체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1조원’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2011년 9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상주본’의 감정가액을 의뢰했는데요. 당시 서지학자 4명이 ‘금전적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지만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이라고 판단했거든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제적 가치가 8000억원 정도라는 자료가 있으니 그보다 가치가 큰 <훈민정음 해례본>은 1조원 이상은 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두 유산에 가격을 매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1조원 운운’ 한 것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었죠.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배익기씨가 불법으로 갖고 있는 '‘상주본’은 단돈 1원짜리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한글 창제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책이죠.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이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한문으로 쓴 ‘예의’는 <세종실록> 등에 실려 있고요. ‘예의’ 부분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찾기는 했는데요.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하는 부분이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창제의 원리와 용법을 상세히 기술한 <해례>는 500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주로 일제강점기에 한글 창제 과정을 두고 온갖 한글폄훼론이 등장했죠. 심지어는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에 착안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설도 나왔습니다.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에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실립니다. ‘494년 만에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은 국보로 지정됐고, 1997년 전 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 문화재청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은 국보로 지정됐고, 1997년 전 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 문화재청 제공

“어찌 뜻하였으랴. 수개월 전 (훈민정음) 원본(이하 해례본)은 경북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돼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갔다…. 단지 책을 입수한 지 겨우 열흘도 넘지 못해 그 번역문이 정리되지 않은 원고 상태로 연재하는 것임을….”

조선일보는 <해례본>의 핵심인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방법)’를 일부 번역해 5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이에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은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 주신 것”이라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만약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겠죠.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스토리 500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현현했을까요.

기사에 등장하는 원소장처(‘경북의 고가’)는 ‘안동’이고, ‘시내의 모씨’는 저명한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습니다. 원소장자와 매각과정과 관련해서는 1950년대 경북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에 의해 처음 밝혀졌습니다. 정철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자는 ‘경북 안동 진성 이씨 가문의 후손 이한걸(1880~1950)’이라 소개했습니다.

“이한걸 선생의 3남인 이용준이 서울경학원(성균관대 전신) 시절의 스승 김모(국어학자 김태준·1905~1949)에게 ‘고향 안동에 훈민정음이 있다’고 언급하자 김모는 곧 전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 현물(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게 되었다. 김모가 ‘국어학계의 연구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겠으니 허락해달라’로 하자 이를 승낙하고….”

최근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원소장처를 둘러싸고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즉 이용준(이한걸의 3남)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처가(광산 김씨 안동종가 ‘긍구당’)에서 유출했다는 주장입니다.

이용준이 장인인 김응수(1880~1957)에게 보낸 편지에 이용준이 “긍구당에서 <매월집>을 가져온 일은 큰 죄이며 송구스럽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용준이 <매월집>을 가져갈 때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유출했을 게 틀림없다는 주장이죠.

최종 소장자가 된 간송 전형필은 1958년 소장 경위를 직접 밝혔는데요.

“친한 서적상이 ‘시골에 훈민정음 원본이 있다’고 하더군요. 내가 ‘원본이 틀림없으면 무슨 노력을 해서라도 살 테니 가져오라’고 했어요…. 1년 후 그 사람이 와서… 개선장군처럼 위세당당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경북도와 안동시가 복각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언해본>.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를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찾아냈지만 <해례본>은 1940년 상반기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기록문화연구소장 제공

경북도와 안동시가 복각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언해본>.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를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찾아냈지만 <해례본>은 1940년 상반기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기록문화연구소장 제공

간송은 당시 <해례본>의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을 군말없이 내줬고, 거기에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줬습니다.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 만큼 대접받아야 한다는 간송의 뜻이었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때까지 494년 만에 극적으로 현현한 ‘간송본’의 원소장처 논란은 남아 있네요. 1940년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이용준이 친가(진성 이씨)나 처가(광산 김씨)의 동의 없이 이 간송본을 팔아넘겼을 가능성이 있죠. 잘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어요. 만약 이용준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라봤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벽지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용준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매매에 간여한 김태준은 어떨까요.

김태준은 경성콤그룹에 참가해 인민전선부를 담당한 사회주의 국어학자였습니다. 남로당 문교부장으로 일하다가 1949년 11월 총살당했는데요. 국어학자 안병희(1933~2006)는 김태준의 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만약 김태준이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씨가 아니라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에게 가져갔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일본인 교수는 1940년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였습니다.

고노는 1947년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는 건데요. ‘간송본’의 가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품에 들어감으로써 ‘무가지보’로 거듭났는데요.

간송의 업적은 그에 그치지 않죠.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책은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널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영인본이 나와 널리 책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간송은 가치 있는 문헌을 오래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공유’라 여긴 겁니다.

“‘간송본’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민족적인 경사였다…. 마침내 영인본이 나옴으로써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한글학회 100년사>)

이렇게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은 1997년 전 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오히려 애물단지가 된 ‘상주본’ 배익기씨가 불법 소장 중인 ‘상주본’은 어떨까요.

‘상주본’은 ‘간송본’과 함께 동일한 목판에서 찍어낸 동일한 원본임은 분명합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겁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원소장처로 알려진 안동 광흥사. 1990년대 광흥사 나한상의 복장 유물로 처음 발견됐고 문화재 도굴꾼 서모씨가 이를 훔쳤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흥사는 조선 전기 불경 등을 간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도 <월인석보> 4책과 <선종영가집 언해> 등이 출토됐다. / 문화재청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원소장처로 알려진 안동 광흥사. 1990년대 광흥사 나한상의 복장 유물로 처음 발견됐고 문화재 도굴꾼 서모씨가 이를 훔쳤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흥사는 조선 전기 불경 등을 간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도 <월인석보> 4책과 <선종영가집 언해> 등이 출토됐다. / 문화재청 제공

‘상주본’에는 ‘간송본’에 없는 장점이 있는데요. 누군가 해례본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용법)를 요약하면서 일종의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연구자들은 대단한 식견을 가진 학자의 주석이라고 평가합니다.

연구자들은 ‘유물로서의 가치’로 볼 때 ‘상주본’은 ‘간송본’과 감히 견줄 수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가장 큰 흠결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간송본’도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전체 66쪽(33장) 가운데 표지와 세종의 어제 서문 등 앞부분 4쪽(2장)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66쪽 중 62쪽이 건재합니다.

‘간송본’과 달리 ‘상주본’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2008년 배익기씨의 최초 공개 때 ‘상주본’을 실사한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기록문화연구소장은 “66쪽 중 18쪽이 탈락된 상태였다”고 전합니다.

“‘상주본’은 세종의 어제 서문·예의 8쪽(4장)과 해례 부분 8쪽(4장), 뒷부분의 정인지 서문 2쪽(1장)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공개된 자료 가운데 가장 앞면의 경우도 3분의 1 이상 부식됐다는데요. ‘상주본’의 보존상태가 ‘간송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간송본’의 경우 4쪽 정도 남아 있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 부분이 ‘상주본’에는 단 1쪽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도 중대한 흠결입니다. 불에 그을린 흔적 또한 심상치 않은 흠결이죠.

무엇보다 ‘간송본’에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이 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고 보존하고 연구한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 있죠. ‘상주본’은 어떻습니까.

‘상주본’의 적법한 소유권은 국가(문화재청)에 있죠. 2018년 배익기씨의 첫 공개 이후 소유권을 다툰 법정소송 결과 조용훈씨(작고)의 승리로 끝났고, 생전에 조씨가 국가에 기증했으니까요. 배익기씨는 그 과정에서 ‘상주본’을 조씨의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됐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요. 절도죄를 저지른 증거가 확실치 않아 형사처벌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배익기씨의 소유는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겁니다.

그럼에도 배익기씨는 1조원의 10%인 1000억원 운운하며 몽니를 부려왔던 겁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배익기씨가 불법 소장 중인 ‘상주본’의 가치는 1조원은커녕 단돈 1원도 될 수 없습니다. 도난문화재를 은닉하거나 사고파는 행위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죠. 배익기씨에게 ‘상주본’은 애물단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배익기씨에게 그 어떤 보상도 해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배익기씨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문화유산을 인질로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있습니다. ‘만고의 역적’이라는 심한 욕까지 먹고 있잖습니까.

2017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배익기씨가 2015년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공개했다. 이후 5년 이상 행방이 묘연하다.

2017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배익기씨가 2015년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공개했다. 이후 5년 이상 행방이 묘연하다.

제3, 제4의 해례본 출현을 기다리며 ‘상주본’은 그렇다 치고, 여기서 한가지 기대를 해보죠. 제1, 제2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겁니다. ‘상주본’ 역시 원래는 안동의 사찰인 광흥사 나한상 복장유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광흥사는 조선 전기 불경 등을 간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거든요. 2013년에도 광흥사에서 <월인석보> 4책과 <선종영가집 언해> 등이 확인되기도 했고요.

일제강점기부터 광흥사뿐 아니라 영주 희방사 등에서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그것을 찍은 판목이 발견됐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경향신문 1952년 11월 12일자는 “희방사(영주)에서 <훈민정음>과 <월인석보> 등을 찍어낸 원판목 400매와 광흥사(안동)에서 <월인석보>를 찍은 판목 222매가 전쟁 중 불에 탔다”고 탄식하고 있네요.

그래서 만약 제3, 제4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온다면 역시 안동이나 그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지금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에 사는 분들은 집 안에 있는 서책 한번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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