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해가 저물면 나는 야한 춤을 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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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브라운관에서 섹시는 오롯이 ‘섹시 가수’라고 명명된 이들에게만 부여된 자격이었다. 춤을 추기 전부터 보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화장, 쥐 잡아먹은 듯 빨간 입술, 손잡이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링 귀고리,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스커트와 가슴골이 보이는 상의가 그의 역할을 알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노래는 십중팔구 템포가 아주 느리고 끈적했으며 목소리는 희미했다. ‘요 쏘 섹시’라든지 ‘섹시 보이’ 등 실제로 섹시라는 단어를 가사에 내포하기도 했다. 노래가 시작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들에게만 허락된 행위인 섹시 웨이브를 미꾸라지처럼 반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심하게 ‘섹시’했다. 그 옆에는 섹시가 무엇인지 초성부터 배워야 할 듯한 여자들이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솜사탕 같은 머리띠를 한 채 입을 앙다물고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범접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업무분담 하나는 끝내주게 돼 있었다. 요정이냐, 요물이냐 중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듯싶었다.

Photo by Hulki Okan Tabak on Unsplash

Photo by Hulki Okan Tabak on Unsplash

섹시를 원하고 원망하다

마치 섹시 가수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그들의 작위적인 요염에도 사람들은 곧잘 숙연해졌다. ‘깔깔’ 웃고 ‘와와’ 손뼉을 치다가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장내 엄숙을 선언한 듯 조용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주변이 지워졌고 어딘가 싸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운 손이 와서 입을 막은 것 같았다. 어른들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도 나에게는 절대로 저런 건 추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게 되는 일이 마치 어딘가로 전락하게 되는 일인 양 말했다. 섹시를 원하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된다고?’ 어린 나는 오기로 벌떡 일어나 화면 속의 그들처럼 온몸을 꺾고 흔들었다. 엄마는 살아 있는 나무토막을 보는 것 같다며 그렇게 끔찍한 움직임은 삼가라고 했다. 내가 움직이는 동시에 코미디가 시작된다고.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의 이 발언을 언급하며 문제 삼는다. 그 말 때문에 내가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나의 역할은 침묵을 깨는 것이었다. 침묵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농담으로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 됐다.

그러면서도 나는 씩씩하게 걷고 싶을 때마다 비욘세와 니키 미나즈의 ‘필링 마이 셀프(feeling my self)’를 들었다. 박재범의 ‘몸매’를 들으며 어깨를 들썩거렸고 울적할 때면 카디 비의 ‘WAP’를 들었다. 걸음걸이가 이상해졌고 묘하게 힘이 났으며 신이 났다. 기막히게 웃긴 코미디언에게서, 단단한 일직선의 다리로 아이스링크를 가로지르는 피겨 스케이터에게서, 얇은 입술을 가만히 다문 여성 장관에게서, 머리카락을 싹 올려묶고 힘찬 기합으로 공을 튀겨내는 배구선수로부터 자꾸만 그것을 발견했다.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게 됐다. 섹시가 위대함과 멀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그것이 청과 홍처럼 구분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빛에 누군가의 손짓에, 목소리에, 말에, 생각에 어려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보다 웃지 못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됐다. 부드러운 손으로 입막음을 당한 듯, 잠자코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열망하게 됐다.

때는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가을, 직장인 3년차였던 나는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풍선 같았다. 답답한 상사를 증오하지 못해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다 바치고 있었다. 회의실 테이블에 놓인 휴지를 3초간 응시하기만 해도 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홧김에 석 달치 월급으로 에르메스 백을 샀다가 웃돈을 얹어 되팔아 짭짤한 이익을 얻었다. 밀려드는 나날을 견뎌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쌓여가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삶은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그때 나의 섹시 댄스 선생님을 만났다. 아무나 내 선생이 될 수는 없었다. 첫째로 아무나 섹시를 가르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둘째로 아무나 이만한 몸치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언자처럼 선언했다. 3명의 몸치를 데려올 테니 우리에게 트월킹(상체를 숙인 자세로 엉덩이를 흔들며 추는 자극적인 춤)을 가르치거라.

마음의 먼지 털듯 엉덩이를 털다

나만큼 몸치인데다 나만큼 섹시해지고 싶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낌새라도 좀 보이는 일에 도전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걸어서 지구를 한바퀴 돌자고 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호기심에 기웃거리다 사라졌다. 딱 한명의 동료만이 자리를 지켰다. 섹시해지고 싶은 범생이 게이였다. 그렇게 섹시한 선생님과 게이와 몸치인 내가 매주 서울 마포구 지하 연습실에 모여 엉덩이를 터는 연습을 하게 됐다. 노래는 아주 흘러간 노래든 지금 나오는 노래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선정적일 것, 평소에 밥 먹는 표정으로는 절대 못 추는 춤일 것이었다. 회사라는 끔찍한 운명을 견디고 나면 섹시 댄스를 출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무실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평범하고 얌전한 회사원으로 보인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야. 해가 저물면 나는 마포구에서 가장 야한 춤을 출 거라고.

처음엔 거울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분명 선생님을 따라 하고 있는데 완전히 다른 장르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같은 동작을 해도 내 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래처럼 흩어졌다. 동요를 부르듯이 발라드를 부르는 것 같았다. 침묵은커녕 웃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몸도 말을 안 들었다. 왼쪽 발이 어디 있는지, 골반과 허리가 어떻게 다른지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새로 구분했다. 섹시는 그야말로 어려웠다. 2시간을 꼬박 연습해 30초를 겨우 따라 움직였다. 누가 제일 몸치인지 결국 알 수 없었다. 내 동작을 따라가느라 다른 사람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막상 부끄러워 거울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내가 민망하고 어색했다. 나를 요정으로 봐야 할지 요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껏 섹시를 표출해도 되는 건가. 내가 매력 있다고 주장해도 되는 건가, 그럼 안 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알쏭달쏭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혼신을 다해 엉덩이를 털고 골반을 씰룩이는 내 모습은 처음 보는 유(類)의 것이었다. 정해진 동작을 몸에 익히고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면 어느새 온몸이 비 오듯 땀으로 젖어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이 덩달아 개운해졌다. 엉덩이를 털다가 마음속 무언가도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실려가기 직전까지도 트월킹을 연습하는 학생이 돼 있었다. 몸이 뻑뻑하든 말든, 섹시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거울 속에는 신나게 흔들리는 내 몸이 있었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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