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라 쓰고 ‘지시’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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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를 시작으로 각 부처의 수장들이 차례대로 업무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책임장관제’를 이행하기 위해 실무자 배석 없이 장관만 참석하는 ‘독대 보고’를 실시한다는 대통령실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책임장관’이라면 책임지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장관이라는 의미겠지요. 장관들은 원전 강국 건설(산업통상자원부), 규제·재정·공공기관 혁신(기획재정부) 등 야심찬 포부를 밝힙니다. 기재부에 “취약계층 세 부담 경감 방안 마련”, 중소벤처기업부에 “불공정 거래 관행 근절”, 산업부에 “원전 생태계 조속 복원” 등 대통령의 당부도 이어집니다. 대통령실과 각 부처의 발표만 보면 대통령과 장관들이 견해를 주고받고 토론도 벌이는 등 업무보고가 생산적이고 순탄하게 굴러가는 듯합니다. ‘내가 장관이라면…’ 하고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습니다.

[편집실에서]‘보고’라 쓰고 ‘지시’라 읽는다

‘새 정부 탄생 후 출범한 내각의 초대 장관이 됐다. 업무보고를 하란다. 국정 임기 5년의 첫 단추를 끼우는 시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만남이다. 그런데… 대통령실로 혼자만 오라고 한다. 실·국장들한테 물어보니 기존에는 담당 사무관들까지 참석하는 자리였단다. 대통령실에선 대통령뿐 아니라 비서실장, 담당 수석비서관, 대변인 등이 함께 나온단다. 이건 뭐 업무보고가 아니라 거의 압박면접 수준이다.’

공직사회에 회자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각 부처 정책담당자들의 책상 서랍에는 어떤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든 그들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쌓여 있다고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당한 자료를 꺼내 그럴듯하게 포장해 국정과제 추진 대책이랍시고 만들어낸다는 거지요.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비아냥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모든 공직자가 그렇진 않겠지만 지난 정권에선 가만히 있다가 180도 뒤집는 해명이나 고해성사가 여러 부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작금의 세태를 보노라면 씁쓸한 게 사실입니다.

이번의 독대 보고도 대통령을 위시한 정권 핵심 실세들이 신임 장관의 뒤를 받치고 있다는 상징성을 연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효과는 다분히 의문스럽습니다. 4 대 1의 수적 열세 하에 이뤄진 업무보고에서 장관들이 과연 대통령과 생산적 토론을 벌일 수 있었을까요. 대통령실 소속 참모들까지 가세한 질문 공세에 답변하느라 진땀을 흘리거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적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건 아닐까요.

대통령과 한목소리를 낸다고 책임장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실무자들의 진짜 의견을 모은 대책을 대통령실에 보고하고 관철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책임장관이라 부릅니다. 정작 정책을 집행하고 현장에서 구현하는 일선 공무원들의 ‘영혼’이 꿈틀대지 않으면 아무리 연일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강도 높은 주문을 이어가더라도 당면한 복합위기의 파고를 제대로 헤쳐나가기는 어렵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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