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반도체 백년지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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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국민총소득 대비 연구개발비는 세계 1위다. 지난 수십년, 한국정부는 연구개발에 엄청난 세금을 쏟아부었다. 정권이 바뀌고 정치가 무능했어도, 한국사회는 과학기술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다. 과학기술은 자원 빈국인 한국이 국제정치의 패권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심각해지는 미중 패권경쟁의 중심에서 과학기술은 더 이상 환상을 좇는 낭만이 아니라 수천만 국민의 삶을 보장할 냉엄한 현실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P1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P1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교육부의 목적이 첨단분야 인재양성이라고 단언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아마 이런 인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짧은 정치인 경력을 반도체연구소 방문으로 시작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초대 장관 또한 반도체 전문가로 골랐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삼성 반도체공장 방문에 동행하면서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국운이 걸린 외교전쟁을 목격했다. 그는 분명 반도체가 한국의 유일한 살 길이라는 인식을 하게 됐을 것이다.

BK21과 이공계 기피의 역설

20년 전, 김대중 정부는 국가 전략적 차원으로 기획된 ‘두뇌한국(BK)21’ 사업을 시작했다.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통해 고등 인재양성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매년 2000억원이 넘는 돈이 투입된 BK21 사업에 한국 대학들은 목숨을 걸었고, 한국의 연구중심대학 서열은 BK21 지정 대학과 아닌 대학으로 갈렸다. BK21은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이 사업으로 한국의 연구경쟁력이 강화됐다는 점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다.

대학원생 인건비를 국가가 지급하는 이 정책을 통해 한국 대학원의 SCI(과학기술논문색인지수)급 논문 수는 급격히 증가했고, 한국 대학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BK21은 한국 이공계 대학원의 양적 성장을 견인했고, 엄청난 숫자의 이공계 석·박사 졸업생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엄청난 투자를 감행했음에도 한국 과학기술경쟁력은 20년 동안 질적 도약을 멈춘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심지어 이공계 대학원 진학률은 미달이다.

김대중 정부의 과감한 BK21 정책에도 불구하고,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는다. 2001년경 수능시험에서 자연계열 응시자의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 일부 공대 교수들의 주장으로 시작된 이공계 기피 현상은 언론의 폭발적 관심으로 국민의 여론으로 전이됐다. 참여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이공계 지원 특별법’을 제정, 이공계 학부에 수조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이 시기에 대학에 입학한 이공계 신입생들은 생활비가 부족한 대학원생들을 비웃으며 학교로부터 무료로 노트북을 지급받고 해외연수를 다니는 등 호화로운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공계 대학원이 아니라 의학대학원 혹은 법학대학원에 입학하거나 취업의 길을 선택했다. 얼마 전엔 과학고 학생들의 의대 진학을 원천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한국 정치인들은 과학기술 인재양성의 문제를 항상 이렇게 국민 여론을 땜질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포퓰리즘이다. 참여정부의 이공계 기피 대책도 마찬가지였다. 이공계 진학률은 높아졌지만, 그 인재들은 대학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잘못된 처방은 결코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으로 되돌아가자. 그는 “교육부의 1번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라고 말했고, “시대에 뒤처진 교육은 의미 없”으며, 그런 “교육부는 폐지돼야” 한다고도 했다. 즉 윤석열 대통령에게 반도체 인재양성은 미중 패권경쟁에서 한국을 살릴 여러 정책 중 최우선 정책임에 틀림없다. 그럼 대통령의 이런 정책적 기반이 실현된다는 가정하에 수도권 첨단학과 정원이 늘고 반도체 관련한 대학의 ‘학부생’이 다수 배출되는 4년 후를 예상해보자.

반도체 인재에게 한국은 매력적인가

반도체 관련 학과를 졸업한 학부생이 현재의 약 2배쯤 배출된다고 가정하자. 2027년의 세계가 큰 변화가 없다는 가정하에 여전히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황에서 중국과 대만 역시 엄청난 속도로 치고 올라와 있을 게 분명하다. 2024년이면 삼성의 파운드리 공장이 미국 테일러 시에 완공됐을 것이고, 대만 TSMC의 미국 애리조나 공장도 완공될 것이다. 2027년 반도체 학과를 졸업한 첨단학과 졸업생들은 바로 산업에 투입될 수 있다. 반도체 분야가 연간 3000명 이상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인력 대부분은 학사급 이상 엔지니어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업이다. 증가한 반도체 관련 학사급 인력을 수용할 기업은 충분할까. 반도체 산업은 호황과 침체를 거듭한다. 만약 이렇게 증가시킨 대학 학과의 졸업생들이 취업하지 못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퇴임한 후 대학들은 모두 학과를 폐지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대다수 전문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 저하는 학사급 엔지니어의 부족이 아니라 석·박사 출신 고급 연구개발인력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즉 대학 학과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 대학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에 가깝다는 뜻이다.

물론 반도체 관련 대학원에 대한 지원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잘 길러낸 고급인재들이 한국 기업에 취업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고급인력을 유치하려는 세계 각국의 경쟁은 치열하고, 한국은 이미 고급 이공계 인력을 미국과 중국에 빼앗기는 인재 유출국이다. 이공계의 고급인재들에겐 국경이 없다. 즉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은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인력에 대한 대우와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경쟁력 있느냐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과 미국보다 고급 엔지니어에게 매력적인가. 질문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BK21은 이공계 기피 현상을 막지 못했고, 이공계 지원 특별법은 이공계 대학원 미달을 막지 못했다. 만약 이런 정책들을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함께 펼쳤다면, 아마 지금 한국사회는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는 한탄을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갖춘 나라들은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특징을 갖는다. 유일한 예외가 한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를 ‘산업 인재 공급’ 따위의 부품으로 취급하는 한, 삼성의 개인플레이에 모든 걸 기대고 있는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강화될 가능성은 없다.

차라리 반도체 관련 연구원들의 연봉을 국가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주는 게 낫다. 세계의 모든 인재가 자연스레 한국으로 몰려들 것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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