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신명 나는 우리 소리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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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은밀해야 했다. 서로의 입을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연습실에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마주 앉았을 때는 신남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얗고 커다란 북을 껴안고 있는 선생님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둥글게 튀어나온 이마, 홑꺼풀의 상큼한 눈망울, 차분한 콧대, 백옥같이 하얀 피부, 평소 말할 때의 목소리가 한 배구선수를 닮은 것까지.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입이 보이지 않으면 정말 어려워서요.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였다. 판소리에는 악보가 없었다. 음원이나 반주도 없었다. 그가 건넨 종이에는 오롯이 글자만 있었다. 곳곳에 연필로 그려진 지렁이 같은 낙서가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은 입으로부터 시작됐다.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그 입에서 새소리가 나기도 하고 귀신 소리가 나기도 했다. 북처럼 웅웅대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도 났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듣고 있다가 어느덧 그것을 따라 내어보라고 했을 때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제 발로 찾은 장소였는데도 말이다. 어렵게 꺼내놓은 소리는 선생님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오래 세워둔 녹슨 자전거를 굴리는 것처럼 삐걱거렸다. 그의 입가만 바라보다가 수업이 끝났다. 처음 배운 곡은 신민요 ‘꽃타령’이다.

양다솔 제공

양다솔 제공

꽃 사시오, 꽃을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
꽃바구니 울러매고 꽃 팔러 나왔소
붉은 꽃 파란 꽃, 노랗고도 하얀 꽃
남색 자색의 연분홍 울긋불긋 빛난 꽃
아롱다롱의 고운 꽃
(중략)
봉올봉올 맺힌 꽃, 숭올숭올 달린 꽃
방실방실 웃는 꽃, 활짝 피었네 다 핀 꽃
벌 모아 노래한 꽃, 나비 앉아 춤춘 꽃

솟아오른 알 수 없는 흥겨움

그가 노래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거렸다.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흥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 같았다. 단어마다 뜻에 딱 어울리는 음절이 붙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타고 가사가 마치 살아 춤추는 듯했다. 순식간에 온갖 빛깔과 모양의 꽃들로 방이 가득 찼다. 꽃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계속 듣고만 있고 싶어졌다. 황홀한 청자가 돼 있다가 금세 내 차례가 돌아오곤 했는데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수궁가’나 ‘심청가’를 배울 것이라는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주방에 가면 설거지부터 해야 하는 법, 부르기 쉽고 배우기 쉬운 민요가 우선이었다. 노랫말이 쉽고 짧은 덕에 가볍게 보았으나 곧 혼쭐이 났다. 들은 대로 열심히 따라 불러봐도 우스울 정도로 똑같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노래가 돼 나왔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신묘한 일이었다. 듣기는 쉬웠는데 부르기는 그렇게 낯설 수 없었다. 처음 내보는 선율과 장단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박자를 놓쳤고 음을 잃어버렸다. 여태껏 알아온 방식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기계가 책을 낭독하는 것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한을 풀려고 갔는데 도로 다시 쌓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듣고 있지만 도통 듣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언어 같았다. 그제야 내게 습관처럼 배인 음과 리듬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우리의 가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라드나 힙합, 재즈, 포크, 록, 댄스, 보사노바 중 어느 것과도 같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언제 다 까먹은 걸까.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태어나 더 오래 몸으로 전해졌을 소리가 가장 낯설게 내 몸에 울리고 있었다. 일본에 만담꾼이 있고 서양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다면 한국에는 소리꾼이 있다. 한을 풀고 흥을 돋우며 혼을 담아내는 대표 이야기꾼 말이다. 놀거리가 궁한 시절 고된 노동에 지친 민중에게는 어느 때보다 기다리는 놀이판이었을 것이며, 이야기꾼에게는 무대를 독차지하고 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내며 관객을 울리고 웃기던 황홀한 무대였을 것이다. 판소리나 민요는 그 시절 우리의 말투와 곡소리와 닮은 것일 테다. 흑인이 평소에 말할 적에도 랩을 하는 것 같은 그루브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웠을 소리와 어찌 이리도 먼 사이가 된 걸까. 그런데도 알 수 없이 솟아오르는 이 흥겨움은 뭘까. 의문과 복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우선은 소리를 내질러야 했다. 노래는 엉터리였지만 어깨가 연신 들썩였다. 시원시원하게 소리쳤다.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장 아름다워

연도도 미상이고 작자도 미상인 노랫말이 심금을 울렸다. 부를수록 입에 착착 감겼다. 매번 전에 못 봤던 표현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 씻기고 다듬어진 돌멩이처럼 반질거렸다. 수사가 가득하고 자극적인 단어가 난무하는 요즘 노래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꾸밈없고 수수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딱 그곳에 있어야 하는 말만 남게 된 것 같았다. 제자리를 찾은 말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여쁘고 수려한 우리말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짧은 한곡을 배우는데도 한달이 넘게 걸렸다. 입에서 귀로, 다시 귀에서 입으로 돌고 돌면서 소리가 조금씩 몸에 배어들었다. 도저히 부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노래를 한소절 한소절 부르게 될 때마다 묘한 전율을 느꼈다. 악보 한장에 담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선율과 소리의 굵기, 불규칙한 장단과 요상한 떨림이 서서히 몸에 포개어졌다.

“‘춘향가’는 언제쯤 부를까요?” 막 첫 곡을 뗀 내가 묻자 15년 넘게 판소리만 한 선생님이 웃는다. “그건 나도 다 못 불렀는데요.” 판소리의 대표 다섯마당에 속하는 ‘춘향가’는 한곡을 다 부르는 데만 8시간이 걸린다. 2시간짜리 영화도 길어 볼 시간이 없고, 40분짜리 클래식도 지루한 요즘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이마저 옛날에는 듣지 못해 아쉬운 일이었을 테다. 악보도 없고 가사를 보면서 부를 수도 없으니 마음먹고 산에 가서 연습만 해도 몇개월이 걸린단다. 3분짜리 노래 한곡을 부르고 완창이라고 말하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외우고 익힐 뿐 아니라 이해하고 체화해 이야기해야 하니,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책이다. 어디든 그이가 걸어가는 곳이 무대이며 이야기의 시작인 것이다. 그 시절 이야기가 판소리가 돼 불리는 것은 이 시대로 치면 넷플릭스나 애플 시리즈가 되는 것만큼 엄청난 일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책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니 그 얼마나 생생하고 귀한 일인가.

그 엄청난 이야기샘의 한자락이 내 삶에 흘러들고 있었다. 한번 배운 노래는 내내 입안을 굴러다녔다. 일상의 장면마다 곡조가 흘렀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녹음기를 켰고, 선생님과 내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을 들으며 나날을 보냈다. 산책할 때도, 장을 볼 때도, 설거지할 때도 흥얼거렸다. 선생님의 선생님, 그 선생님의 선생님으로부터 내려왔을 가락을 따라불렀다. 부르는 만큼 더 많은 것들이 들려왔다. 누군가에게 불러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일주일에 한 번 소리를 찾아가는 것만으로 매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춤추는 나뭇잎처럼 몸이 덩실거렸다. 신바람이 났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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