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양녕과 충녕, 형제간 알력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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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이제·1394~1462)과 관련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한 이야기는 두 동생 효령대군(이보·1396~1486)과 충녕대군(이도·1397~1450)의 일화일 겁니다.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 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 / 담양 몽한각 소장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 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 / 담양 몽한각 소장

“옛날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했다. 어느날 야밤에 효령의 집을 찾아가 효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효령 역시 불가에 입문했다.”(<선조실록> 1603년 3월 9일)

야사 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가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들겼다. 지금도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양녕대군이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세종실록> 1446년 4월 23일자)이라고 한 거죠.

서로 싫어했던 세자(양녕)와 충녕(세종) 둘 다 왕위를 쿨하게 내던진 양녕대군의 호방한 기품을 알려주는 일화죠. 1789년 정조(재위 1776~1800)가 작성한 ‘지덕사의 기문(至德祠記)’을 통해 양녕대군의 사당 이름을 ‘지극한(至) 덕(德)’, 즉 ‘지덕사(至德祠)’로 지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세자(양녕대군)가 성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술과 기생 속에서 보냈으니 이것이 양보의 지극한 덕”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사인 <세종실록>을 토대로 조목조목 짚어보려 합니다.

양녕과 충녕이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건 분명합니다. 세자가 매형 이백강(1381~1451)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누이(정순공주·1385~1460)에게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忠寧非常人也)”(<태종실록> 1414년 10월 26일)라 했으니까요.

1416년에 이르면 세자(23세)와 충녕(19세)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암시하는 기사가 쏟아집니다. 1월 9일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세자가 시종들에게 “내 풍채가 어떠냐”고 물었답니다. 곁에 있던 충녕대군이 “먼저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란다”고 지적질을 합니다.

3월 20일 상왕(정종)이 베푼 술자리가 끝난 뒤 세자(양녕대군)가 기생 칠점생을 끌고 돌아오려 했습니다. 칠점생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충녕대군이 “아니 집안 식구들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고 정색합니다. <태종실록>은 “이때부터 세자는 충녕대군과 가는 길이 달라 마음속으로 매우 싫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9월 19일 세자가 할머니(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제삿날에 두세명과 어울려 바둑을 뒀습니다. 이때도 충녕대군은 “세자가 간사한 소인배들과 그것도 할머니 제삿날에 놀음놀이를 하느냐”고 다그쳤습니다. 세자는 충녕대군에게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쏘아붙였습니다. 1418년 5월 11일 폐세자의 뇌관을 당긴 ‘어리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세자가 충녕대군에게 “네가 임금에게 고자질한 거냐”고 쏘아붙입니다.

동생(충녕)과 비교당한 세자 형제간에 왜 이렇게 됐을까요. 실록을 보면 태종이 늘상 세자(양녕대군)를 충녕대군과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대목이 눈에 띄는데요. 1416년 2월 9일 태종이 “집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만나면 반드시 길 떠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할 것”이라 했는데요. 이때 충녕이 “<시경>에 ‘황새가 언덕에서 우니, 부인이 집에서 탄식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인 지덕사. 1675년(숙종 1)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으로, 원래 숭례문 밖에 있던 것을 19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인 지덕사. 1675년(숙종 1)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으로, 원래 숭례문 밖에 있던 것을 19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태종은 충녕이 고전을 인용해가며 대답하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자(양녕)가 (충녕을) 따를 바가 아니다”라고 칭찬했습니다. 이 날짜 실록은 과거의 일화를 덧붙입니다. 세자(양녕)가 임금 앞에서 문과 무를 논하다가 뜬금없이 “충녕은 용맹하지 못하다”고 ‘디스’했습니다. 임금은 “큰일을 두고 대의를 결단하는 데는 충녕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두둔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그해(1416) 7월 18일 태종이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면서 여러 신하와 시를 주고받았는데요. 말이 ‘노성(老成·노련함)한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는데 이르자 충녕대군이 나서 “<서경>은 ‘기수준(耆壽俊)이 궐복(厥服)에 있다’고 했다”고 거침없이 시구(詩句)를 이었는데요. ‘기수준이 궐복에 있다’는 말은 ‘늙고 경험 많고 뛰어난 사람(기수준)이 그에 걸맞은 직책(궐복)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태종은 충녕대군의 학문이 이미 통달한 것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세자를 돌아보며 한마디 툭 던졌답니다. “너는 학문이 어째서 충녕보다 못하냐”고요.

세자(양녕)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양녕대군의 실덕과 폐행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태종이 폐세자를 결정하기 직전(1418년 6월 1일) 세자를 책망하며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고 질타합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요. ‘비행 소년의 일탈기’를 보는 듯합니다.

세자는 선공감 부정(종 3품) 구종수·구종지·구종유 등 3형제와 악공 이오방·이법화 등과 사적으로 교유했습니다. 이들은 궁궐 담을 넘어 세자궁에 잠입하는가 하면, 세자 역시 야음을 틈타 궁궐을 빠져나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여성편력이 특히 물의를 빚었습니다. 봉지련(1410)과 소앵(1413) 등 기생들을 궁중에 들인 건 물론이고 한때 상왕(정종)을 모셨던 여인(초궁장)과도 사통(1414~1415)했습니다.

그 결정판은 어리(於里)와의 위험한 애정행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1417년 2월 15일 세자의 총애를 받던 악공 이오방이 “전 중추 곽선(무신) 첩인 어리의 자색과 재주가 뛰어나다”고 수군거려 시작됩니다. 세자는 “남편(곽선)이 있는 몸”이라고 버티던 어리를 궁중으로 납치합니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이오방과 구종수·구종지·구종유 3형제 등은 참형을 당했고 어리는 쫓겨났습니다(1417년 3월 5일).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죠. 세자가 쫓겨난 어리를 다시 동궁으로 들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리는 세자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일이 또 발각돼 어리가 다시 쫓겨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자의 언행은 또 있습니다. 태종은 1410년 세자의 외삼촌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처단한 뒤 남은 두 형제(민무회·민무휼)를 노리고 있었는데요. 이 무렵 임금이 참석한 연회에서 세자가 한껏 술에 취해 “종사를 위해 무회·무휼 형제를 죽이라”(1416년 1월 10일)고 아뢰었습니다. 결국 세자의 남은 두 외삼촌은 3일 뒤 그들이 그토록 아꼈던 세자의 이해할 수 없는 취중발언 때문에 자결하고 맙니다. “임금과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폐세자의 조짐들 태종은 언제부터 폐세자 후에 충녕대군을 세자위에 올릴 생각을 했을까요.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문화재청 제공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문화재청 제공

1413년 8월 13일자 <태종실록>에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태종이 대전내관을 시켜 세자의 비위를 맞춘 두 내관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세자가 임금의 명을 전하는 대전내관에게 “네 이름이 무어냐. 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전해듣고 “대체 뭘 기억하겠다는 거냐. 세자 자리가 안전할 것 같냐”(8월 15일)고 펄펄 뛰었답니다. 세자의 스승인 이래(1362~1416)는 기생에 빠진 세자에게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느냐. 자칫하면 세자의 지위마저 지키기 어려울 것”(1415년 1월 28일)이라고 걱정합니다.

또 의령부원군 남재(1351~1419)가 충녕대군과의 술자리에서 “군왕의 아들이 누구든 임금이 되지 못하겠느냐. 학문을 좋아하는 대군이 보기 좋다”고 말했습니다. 태종은 남재의 언급을 전해듣고는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라고 외치며 크게 웃었답니다(1416년 12월 30일).

부왕(아버지)에게 보낸 작심 편지 1418년 5월 30일 파국이 닥칩니다. 세자(양녕대군)가 어리를 내쫓은 부왕(태종)에게 큰 글씨로 2장 분량의 친필 서한을 올리는데요. 편지는 아버지를 향한 ‘작심 비판’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세자는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세자는 한술 더 떠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을 구하지 않으시냐”고까지 치받았습니다. 천하의 지존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에게 “당신이나 잘하라”고 항변한 겁니다. 폐위를 각오하지 않으면 올릴 수 없는 편지였던 겁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집니다. 대신들이 벌떼처럼 “불손한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문을 올립니다(6월 2일).

이튿날(6월 3일) 태종은 “이미 천명이 세자를 떠났다”면서 폐세자의 결단을 내립니다.

이때 태종이 차기 세자를 정하면서 이성을 잃은 듯, 오락가락 행보를 보입니다. 처음에는 “세자의 다섯 살짜리, 세 살짜리 두 어린 아들 중에서 왕세손을 삼고자 한다”면서 “신료들이 의론하라”는 명을 내리죠. 조정에서 벌집 쑤셔놓은 듯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상당수가 “이제(폐세자·양녕대군)의 아들을 세우는 게 옳다”고 주장했지만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택현·擇賢)이 마땅하다”는 반론이 커져갑니다. 어떤 이는 “옛사람들처럼 거북점(龜占)과 시초점(筮占)을 쳐서 결정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기까지 합니다. 태종은 여러 의론을 들어본 뒤 “나는 점을 쳐서 정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내전으로 들어가 중전(원경왕후)에게 “여러 신하가 ‘어진 사람(충녕을 지칭)을 택하자’고 하는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어봅니다. 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건 화란(禍亂)의 근본이 된다”고 반대합니다. 태종은 왕후의 말이 옳다고 여겼지만 한참 후에 다른 결단을 내립니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일이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게 마땅하다.”

1789년 정조 임금은 양녕대군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에서 “양녕대군은 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냈다”고 찬양했다. 정조는 양녕대군의 ‘양보의 미덕’을 ‘지극한(至) 덕(德)’이라고 치켜세우며 사당 이름을 ‘지덕사’라 했다.

1789년 정조 임금은 양녕대군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에서 “양녕대군은 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냈다”고 찬양했다. 정조는 양녕대군의 ‘양보의 미덕’을 ‘지극한(至) 덕(德)’이라고 치켜세우며 사당 이름을 ‘지덕사’라 했다.

점을 쳐서 차기 임금을 뽑았다면… 그렇게 해서 낙점된 분이 충녕대군 이도, 즉 세종대왕인데요. 태종은 왜 충녕대군을 뽑았는지 아주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일을 조목조목 처리하지 못한다. 언제나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다…. 반면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한다…. 또 정치를 알아서 국가대사에 합당한 의견을 낸다. 더러는 뜻밖의 의견도 많았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꼽은 이유 중 하나는 생뚱맞게도 ‘세종이 술을 마실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효령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으면 어찌 중국 사신을 접대하겠는가. 충녕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신다.”

태종은 충녕대군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충녕대군의 아들 중에는 장대한 놈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종이라면 폐세자(양녕대군)를 절대 해치지 않고 평생 대접할 것”(6월 6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자가 된 충녕대군은 두 달여만인 1418년 8월 11일 즉위하는데요.

여기까지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즉위 풀스토리입니다. 양녕대군은 폐위 후에도 갖가지 악행을 저질러 여러차례 탄핵을 받았는데요. 세종은 “양녕이 그런 게 어제오늘의 일이냐”고 덮어주었답니다. “충녕이라면 폐세자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태종의 예언이 맞았습니다. 양녕대군은 69세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1462년(세조 8) 세상을 떠났는데요.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 등 5명의 임금 아래서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살았던 겁니다.

솔직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양녕대군이 임금자리에 오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녕이 왕위에 올랐다면 세종이라는 성군이 나오지 않았겠죠. 한글 창제도 없었을 거고요. 만약 태종이 양녕대군의 아들이나 혹은 점을 쳐서 나온 결과를 보고 후계자를 정했다면 어찌 됐을까요. 그 또한 모골이 송연해지네요.

그러고 보면 태종과 그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위대한 업적이 있네요. 세종대왕을 낳았고, 또 그분에게 왕위를 잇게 했으니까요. 뭐 양녕대군의 업적도 있겠네요. 왕이 되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는 거네요. 양녕대군 때문에 비명에 간 분들의 사정은 딱하지만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시대를 위해 죽은 희생양으로 여기면 그래도 죽어서나마 위안이 될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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