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폭군 이반> 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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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리더십 펼친 이반 4세

참혹한 전쟁에 명분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어찌 됐든 러시아 입장은 ‘전(全)러시아주의’ 혹은 ‘대(大)러시아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중세의 대제국 키이우 루시 이후 동슬라브 민족은 외세의 침략에 부침은 있었지만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왔다는 주장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입장은 다르다. 한 뿌리를 공유하긴 하지만 그것을 러시아 중심 단일국가로 강요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현실 정치와 작금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정당성 싸움의 핵심 고리다.

<폭군 이반> 1부 스틸 / MUBI

<폭군 이반> 1부 스틸 / MUBI

그렇다면 대체 ‘전러시아’, ‘대러시아’란 무엇이고 언제 시작했는지 짚어봐야 한다. 이견 없이 그 출발점으로 언급되는 이는 바로 이반 4세(재위 1547~1584)다. 러시아는 물론 세계사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존재다. 중국 역사로 보자면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룬 시황제에 비견된다. 그는 몽골 침략으로 대귀족들의 분령지 공국과 도시국가들로 쪼개진 러시아를 단일한 전제국가로 통합했다. 이후 여러 번 난세가 도래했지만 ‘통일 러시아’라는 이념은 굳건히 자리 잡기에 이른다. 이반 4세가 문을 열고 표트르 1세가 러시아 제국을 선포했으며 스탈린이 초강대국 소련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러시아 역사에서 이 셋은 현재의 대국 러시아를 상징하는 인물들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뇌제’라 불린 군주

과거 키이우가 중심이던 동슬라브의 패권은 이반 4세를 기점으로 모스크바가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기 현재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의 대부분은 당시 동유럽의 강대국이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가 서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출구인 발트해는 북유럽의 패자인 스웨덴의 차지였다. 이반 4세는 봉건 귀족에 맞서기 위해 평민들을 등용하고 유럽과 무역을 시도했다. ‘타타르의 멍에’를 끊기 위해 그 후예인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해 영토 확장을 개시했다.

이반 4세를 후대는 ‘뇌제’,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그의 전제통치가 숙청과 테러를 수단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위 내내 암살과 모반에 시달렸고, 귀족들의 태업이나 반역 음모에 여러 번 좌절하기도 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폭군 이반> 연작으로 남아 있다.

전작 <알렉산더 네브스키>의 성공에 힘입어 에이젠슈타인은 세계대전 와중임에도 차기작에 도전한다. 네브스키가 몽골과 서유럽 틈에서 멸망 위기에 처했던 러시아의 불씨를 살렸다면,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복원된 체제를 다시 중앙집권국가로 각인시킨 이반 4세를 신작의 주역으로 내세웠다. 총 3부작으로 기획된 첫 번째 편은 1944년에 등장한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기를 잡은 결정적 시기였다.

<폭군 이반> 1 포스터 / Rotten Tomatoes

<폭군 이반> 1 포스터 / Rotten Tomatoes

이반 4세는 최초로 ‘황제’임을 선포한다. 이제 러시아는 ‘루스 차르국’으로 불리며 동로마 제국 멸망 후의 ‘제3의 로마’를 자임한다. 그의 재위 기간 러시아는 사방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대국으로 팽창할 기틀을 닦는다. 1부에서 타타르의 후예 카잔을 정복하는 순간은 황제의 영광이 극에 달하는 절정이다.

하지만 어둠이 드리운다. 그가 중병에 걸리자 귀족들은 반역을 꾸미고 황제의 이해 당사자인 황후를 독살한다. 서유럽과 교역로를 열려던 리보니아 전쟁에 태업을 일삼고 군자금 제공을 거부한다.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극도의 상징과 표현주의 기법을 구사해 기득권 세력의 음모와 실망과 불안에 흔들리는 이반 4세의 심리를 교차시킨다. 좌절한 황제는 시골로 떠나버린다. 황제를 찾아 평민들이 모여들고 이반 4세는 그들을 버릴 수 없어 모스크바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이 순간 감독은 거대한 상징 이미지를 화면에 구현한다. 멀리서 눈 덮인 설원을 걸어 황제를 모시러온 무수한 신민을 언덕 위에서 바라보며 다시 각오를 다지는 황제가 클로즈업된다. 이 순간 화면은 좌우로 대칭을 이룬다. 황제의 엄격하고 신념에 찬 얼굴이 절반, 하얀 들판에 개미처럼 긴 행렬을 이룬 신민의 군집이 절반을 차지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일한 의지로 결집하는 집단주의는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자애롭고 엄격한 인민의 지도자로 상징되던 스탈린의 초상화나 포스터 이미지의 결정판인 셈이다.

2부가 시작된다. 이반 4세는 내부의 적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인다. 자신의 개혁과 중앙집권화를 이해해줄 벗을 찾지만 돌아온 건 외면과 배반뿐이다. 황제는 고독과 편집증에 시달린다. 결국 적들에 맞서 이반 4세는 철권통치를 시작한다. 황제는 한층 더 두려운 존재가 돼간다. 그 과정의 묘사와 함께 다른 축으로 황제가 유년시절 겪었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와 귀족들과 항쟁을 결심한 배경이 소개된다.

<폭군 이반> 2 포스터 / IMDB

<폭군 이반> 2 포스터 / IMDB

미완으로 남은 작품

음모의 절정은 황제의 친족 블라디미르 대공을 옹립하기 위한 황제 암살 시도다. 영화 3분의 2가 지날 즈음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뀐다. 이 총천연색 화면은 1부 대관식의 웅장한 흑백 풍경과 대비된다. 젊고 패기 넘치던 황제 대신 피로와 의심으로 휑한 형상의 황제가, 질서정연한 의식 대신 친위대의 음산한 경계가 펼쳐지는 잔치의 끝은 대숙청이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전능한 신의 대리자로서 이반 4세가 클로즈업되며 2부가 끝난다. 스탈린은 점점 비밀경찰과 숙청에 의지하게 된 영화 속 이반 4세가 자신과 겹쳐 보여 불편했을 테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1944년 발표한 1부는 스탈린의 격찬을 받았지만, 이듬해 완성한 2부는 개봉하지 못했다. 흐루쇼프 집권 후 스탈린 격하를 시작한 1958년에야 공개됐다. 감독은 1948년에 급사해 <폭군 이반> 2부가 유작이다. 이반 4세의 말년과 평가를 담으려던 3부는 미완으로 남았다.

의미심장한 장면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려 한다. 2부 시작과 함께 1부에서 황제의 벗이던 크룹스키 대공이 적국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그문트 2세는 일장연설을 펼친다. “문명화된 서양 국가들이 모스크바의 야만인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발트국가들은 유럽의 전초기지가 돼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가 서양을 섬기게 할 것이며 유럽에서 러시아인들을 내쫓아 그들을 아시아 초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

이반 4세의 철권통치는 서방으로 교역로를 찾으려던 리보니아 전쟁의 패배 후 본격화된다. 이후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바다를 통한 출구와 서방으로의 진출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위의 대사는 2022년의 러시아를 비난하는 사설이 아니라 1940년대 완성된 영화 속 대사다. 역사의 기억이 현재의 러시아를 공포에 기초한 대결주의로 내몰고 있다는 예시인 셈이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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