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생활 다도인(生活茶道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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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 나도 지금을 살고 있다

호로록,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다. 세간에는 해가 뜨는 것을 하루의 시작이라 하던데 나와는 영 상관없는 일이다. 방금 우린 차의 첫 잔을 들이키는 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다. 눈이 번쩍 떠지고 몸에 온기가 솟아난다. 그제야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그것에 무늬를 만드는 식물의 이파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내며 끓는다. 소리 없이 일렁이다가 이따금 커다란 공기 방울이 퐁 퐁 소리를 내며 피어오른다. 물도 꼭 사람 같아서 오랫동안 살살 달래듯 끓이면 그렇게 온화하고 유순할 수가 없다. 그러다 가끔 눈물 한방울만 한 완벽한 모양의 물의 구(球)가 나타나 물 표면 위를 굴러다니는 걸 목격하기도 한다. 물 위를 미끄러지는 요정을 본 것처럼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물을 차호에 부으면 샤라락 소리가 난다. 대지의 한 부분을 뚝 떼어 만든 것 같은 고동색의 차호가 물기를 머금고 미끈하게 빛난다. 호로록, 샤라락, 퐁-퐁, 휘이이. 나의 아침을 이루는 소리다. 나는 기지개를 켠다. 하늘로 땅으로 팔다리를 쭉 늘린다.

양다솔 제공

양다솔 제공

노래로 시작하는 하루도 있었다. 행자로 살던 날들이었다. 칠흑 같은 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모두가 꿈속을 헤매는 고요한 새벽, 절은 가장 먼저 시작을 알린다.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가장 낮게 낮추고 목청껏 염불을 암송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부른 노래는 머리보다는 마음에, 마음보다는 몸에 기억되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을 때마다 커다랗게 둘러앉아 길고 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밥을 옮기면서도 부르고, 그릇에 덜면서도 부르고, 먹으면서도 부르고, 그릇을 닦으면서도 불렀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만물에 감사하며, 세상에 다녀간 것과 다가올 모든 것에 감사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매일 노래하는 걸까 싶었다. 마치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처럼 말이다.

차로 시작하는 하루

그 시기에도 나의 호로록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좁아터진 행자용 사물함 어딘가에는 차 항아리들이 있었다. 사탕을 빼먹듯이 찻잎을 떼어다가 끓는 물이 들어 있는 보온병에 퐁당 빠뜨렸다. 틈날 때마다 호록 호록 마셨다. 웃을 때면 갈색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매일 커다란 보온병을 들고 다니는 젊은 행자를 의뭉스럽게 생각했다. 보는 사람마다 “차예요.” 말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누가 차를 저렇게까지 마시냐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직장에서의 하루는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만원 버스의 신음을 견디며 사무실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나 믹스커피를 타 마셨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타났다. 누구도 기지개를 켜지 않았다. 차를 우리거나 노래하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고 매일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지퍼백에 싸온 차를 보온병에 퐁당 빠뜨렸다. 사람들은 대놓고 나를 힐끔거렸다. 그들의 따끔한 시선을 받아 가며 절실하게 차를 우렸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아니라 지금 마시고 있는 차가 나를 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파티션 사이에서 호로록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차를 중심으로 산다. 가장 많은 돈을 차에 쓰고 가장 좋은 공간을 차 도구들이 차지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찻상 앞에 둔다. ‘이빨’은 늘 갈색빛을 띠고 아끼는 물건들엔 차 얼룩이 묻어 있다. “차를 대체 언제 마시냐”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질문은 없다. “차를 언제 안 마시냐”고 물어야 한다. 차와 어울리지 않는 때와 장소는 없다. 아침이면 깨어나서 좋고 오후에는 빛과 함께 무르익어서 좋으며 밤에는 하루를 가다듬기에 좋다. 맑은 날에는 맑아서 흐린 날에는 흐려서 맛있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이 내리면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그곳이 천국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혼자 함께 여럿이, 아이 친구 노인 할 것 없이 좋다.

차를 마시는 일은 나의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이다. / 양다솔 제공

차를 마시는 일은 나의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이다. / 양다솔 제공

씩씩한 애와 성숙한 애

여러 사람이 둘러 안아도 될 만큼 커다란 나무에서 보이차 잎은 자란다. 어떤 나무는 천년도 넘게 살았다. 그곳에서 매년 새잎이 열린다. 그 잎을 말리고 오랜 시간 세심한 온도와 습도로 숙성해 만든 보이차는 건강한 미생물들로 가득하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을 보태느냐, 안 보태느냐에 따라 ‘생차’와 ‘숙차’라는 두 갈래로 나뉜다. 생차와 숙차를 ‘씩씩한 애’와 ‘성숙한 애’로 소개하고 싶다. 생차를 마시면 기운이 솟고 숙차를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간을 들여 자연적으로 숙성된 생차는 오랜 시간을 기다린 만큼 고유의 맛을 낸다. 톡톡 튀고 야생적이며 에너지가 세다. 사람의 힘으로 덥히거나 쪄서 숙성을 도운 숙차는 부드럽고 유순하며 진하다. 빨리 맛있어지지만 일찍부터 길을 들인 아이처럼 조숙하다. 숙차가 묵묵하고 성숙하게 할 일을 하는 온화함을 가졌다면, 생차는 오래 헤매고도 자기만의 길을 찾는다.

차는 사람처럼 각자의 길을 간다. 시간이 갈수록 맛이 좋아지지만,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견딘 차는 빛을 발하지만, 밀폐된 꿉꿉한 공간에서 보관한 차들은 그렇지 못하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당연히 훌륭한 어른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스무 살부터 예순까지 가장 맛있게 무르익고, 이후엔 맛이 떨어지기 시작해 백년이 넘은 차는 마시지 않는다. 재밌는 사실은 너무 적은 양의 차를 따로 오래 보관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하물며 차도 혼자 떨어져 있으면 살 수 없다.

그날의 차를 고르는 일이 매일의 첫 번째 선택이 되었다. 너무 좋아서 하루도 쉬지 않았을 뿐인데 15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지치거나 질리기는커녕 내일도 찻상 앞에 앉을 생각에 설레기만 한다. 이런 일을 정서라고,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가장 자연스럽게 마음이 동하는 일, 왜 계속하는지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는 일 말이다. 같은 차를 우리는데도 매일 맛이 다르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한 듯 다른 것처럼 그렇다.

매일 맛있는 차는 없다. 날마다 바뀌는 내 마음처럼 차도 다른 얼굴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울함에 빠진 듯 쓰고 무거워지는 차가 있는가 하면 깨끗이 씻긴 듯 맑아지는 차가 있다. 같은 차도 어떤 재질과 모양의 차호에 우리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알맞은 차와 차호가 만나면 최상의 맛을 낸다. 심지어 누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는지도 영향을 준다. 그럴 때면 나 또한 늘 좋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저 알게 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가진 무늬와 결대로 가장 잘 쓰일 수 있는 위치가 어딜까 생각한다. 잘 익은 차 같은 사람이 되려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나 혼자 잘살 수는 없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천년이 넘은 나무에서 매년 새잎이 돋아나듯, 수천년의 역사 속에 피어난 새로운 하루를 생각한다. 다시 한모금, 호로록. 오늘도 거실에는 많은 것이 숨을 쉬고 있다. 차도 나도 지금을 살고 있다.

양다솔 작가는 글쓰기 소상공인으로 살고 있다. 수필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썼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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