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온갖 진실과 하나의 사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최근 방영 중인 일본드라마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에 꽤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작중 형사가 반드시 범인을 체포하겠다며, 진실은 하나니 분명 도달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용의자로 몰린 주인공 토토노는 상투적이기까지 한 그의 다짐이 의아하다는 듯 이내 반박한다. 어떻게 진실이 하나밖에 없느냐고 말이다. 가령 A와 B가 계단을 오르내리다 부딪혀 B가 추락했다고 치자. B는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A가 계단에서 밀쳤다고 주장하는 반면, A는 B를 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으며 엄연히 사고였다고 항변한다. 둘 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토토노의 말마따나 “진실은 사람의 수만큼 있다.” 그럼에도 ‘사실’은 하나다. 바로 B가 계단에서 떨어졌다는 사실. 그러니 “진실 같은 모호한 것에 잡혀 있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은 어쩐지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장르의 핵심을 오조준함으로써 외려 정확히 관통하는 흥미로운 논박처럼 다가온다.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 표지 / 모모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 표지 / 모모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에는 온갖 진실이 등장한다. 정말로 진실은 등장인물의 수만큼 존재한다. 물론 ‘사실’은 하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가정집 마당 정원에서 네 살 여자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가정주부 사토코는 딸아이의 치과 치료를 위해 동생 유리코가 맡아 달라던 네 살배기 조카딸을 치매 증세를 보이는 시아버지에게 맡긴 채 잠시 집을 비웠다. 그 짧은 공백 사이 참혹한 유아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유일한 목격자일 시아버지의 기억은 혼탁할 뿐 아니라 그사이 집에 들른 의문의 남자도 있다. ‘사실’은 무척 단순하지만, 장이 바뀌면서 등장인물 각각의 은밀한 고백이 이어지는 사이 숨은 비밀과 함께 진실 또한 천변만화한다.

사실 작품의 핵심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일가족 내에 도사린 질투와 치정에 있다. 사토코와 유리코 자매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어렸을 적부터 서로를 시기하고 때로는 혐오하는 사이다. 유리코가 딸을 언니에게 맡긴 건 남편 몰래 외도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또 다른 복수의 불륜 상대들을 통해 이윽고 새로운 진실로 도약한다. 특히 시아버지 게이조가 과거 태평양전쟁에 출정하면서 아내에게 딸아이가 그의 자식이 아니라는 고백을 건네 들은 일화는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이자 자매 부부의 복수와 애증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치정(癡情), 즉 어리석은 감정인 줄 알면서도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동서 간에 교차하는 애정과 그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 확정적이었던 이전의 진실은 가볍게 뒤집힌다. 간단한 사실과 몇몇 인물만 두고도 여러개의 진실이 결말까지 요동치면서 인물 간 내막은 물론 범인마저 뒤바뀌는 여러 번의 반전은 그래서 더 놀랍다.

제목 <백광(白光)>은 하얗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게이조가 전쟁 당시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맞닥뜨린 살인 장면으로 여러차례 형상화되며 작품 고유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대변한다. 이는 한낮의 태양빛 아래 조금씩 발가벗는 등장인물 모두의 죄책감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 각자가 지닌 애증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연애소설로서의 면면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가 렌조 미키히코 특유의 장점 또한 불온하고도 아련한 정조를 한껏 북돋운다.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진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서사도 대단하지만, 나락인 줄 알면서 부러 걸어 들어가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야말로 가히 이 작품의, 미스터리의 정수라 할 만하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장르물 전성시대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