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베트남에 불어닥친 영어 사교육 열풍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급여가 높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상위권 대학 출신이어야만 한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려는 건 당연지사다. 초등학생 때부터 과외를 하고 가능하면 유치원생 때부터 영어, 수학 과외를 시켜 자녀들의 성적을 높이려는 부모들이 모여 있다. 서울 강남의 대치동 이야기가 아니다. 베트남 대도시의 부모들 이야기다.

베트남 호찌민 푸미흥 구몬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부모 / 유영국 제공

베트남 호찌민 푸미흥 구몬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부모 / 유영국 제공

2010년 교육과학사에서 발간한 <사교육: 현상과 대응>을 보면 베트남 중학생들의 76.7%가 사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한국 중학생들의 77%, 일본 중학생들의 75.7%가 사교육을 받았다. 한국 못지않게 높은 베트남의 사교육 비율은 먹고살기도 버거울 것 같은 ‘동남아의 못사는 나라’라는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2019년 1월 영국에서 열린 세계교육포럼에서 베트남 교육부 장관은 베트남 현지에서 들어가는 교육비가 2000년 11억1000만달러(약 1조3000억원)에서 2018년 140억달러(약 16조8000억원)로 12배 이상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의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2022년 현재 소득 수준이 높은 하노이, 호찌민 같은 대도시의 사교육 비율은 90%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IELTS 준비 여념 없는 중고생들

요즘 베트남의 중고생들은 IELTS (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 준비에 여념이 없다. IELTS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이 주관하며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 유학, 이민, 취업을 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능력 시험이다. 베트남 주요 대학들은 변별력이 떨어지는 고등학교 영어 성적 대신 IELTS를 입학 성적에 반영한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베트남 중상류층은 자녀들의 고액 영어 과외에 여념이 없다.

뚜오이 쩨(Tuoi Tre), 라오 동(Lao Dong) 등 베트남 주요 언론은 IELTS 6.5~7.0을 받고도 베트남 명문대 합격을 불안해하는 학부모 이야기를 보도했다. IELTS 6.5~7.0이면 토익 점수로 변환했을 때 대략 900~950점 이상으로 캐나다 주요 대학들의 입학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수준이다. IELTS를 준비하려고 우리 돈으로 수백만원에 해당하는 학원비와 과외비를 지출하는 부모들에 관한 기사는 베트남 공장 노동자들의 한달 급여가 30만원이 채 안 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씁쓸하다. 베트남에서도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어려워 보여서다.

베트남의 교육열이 한국 못지않은 건 지리적으로는 동남아 국가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중·일과 함께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 국가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1075년에 과거제도를 도입한 이래 1919년까지 844년간 시험을 봐서 국가의 인재를 뽑는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에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가문을 일으키는 ‘입신양명’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현실적으로는 높은 급여를 주는 좋은 직장을 보장하는 명문대학에 가려는 교육열인데, 이는 한국과 비슷하다.

베트남 에듀테크 기업 현황 /nguyentrihien.com

베트남 에듀테크 기업 현황 /nguyentrihien.com

디지털 교육 확충 앞장

베트남 정부는 양질의 인력 양성을 위해 교육 인프라 확충을 국가적 사업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손재주가 좋은 값싼 노동력과 미중 갈등 덕분에 베트남이 생산 거점으로 거듭나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인건비 때문에 생산효율이 낮아질 날이 머지않아서다. 베트남은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제조국에 그치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새로운 산업에서 먹거리를 창출해낼 수 있는 교육사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2008년부터 국가 예산의 20%를 교육사업에 쏟고 있다. 특히 디지털 교육사업을 확충하려고 노력 중이다. 2021년 7월 베트남 정부는 2023년까지 중고등학교 및 직업학교의 80%, 전국 대학의 90%에서 온라인 교육을 원활하게 실현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국가 전체 예산의 20%라고 하지만 베트남 전체 GDP의 절대적 규모가 선진국들에 비해 적고, 정부 주도 발전이라는 한계가 있다.

베트남 호찌민 1군의 과외 공부방 모습 / 유영국 제공

베트남 호찌민 1군의 과외 공부방 모습 / 유영국 제공

에듀테크 산업의 빠른 발전 기반을 마련한 건 다행이다. 미디어 리서치 업체 훗스위트(Hootsuite)에 따르면 2020년 베트남은 인터넷 보급률 70%, 스마트폰 보급률 63%로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해 IT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다. 교육과 정보통신 기술이 결합한 에듀테크 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재택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베트남 시장 평가 업체 베트남 크레딧(Vietnam Credit)은 베트남의 에듀테크 시장이 2019년 20억달러(약 2조4000억원)에서 2021년 30억달러(3조6000억원) 규모로 50% 급성장했다고 추정했다. 베트남의 다양한 교육기업들이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창출해내고 있는 상태다.

베트남의 교육기업으로는 최초로 자체 콘텐츠를 미국, 영국, 싱가포르 등 해외 대학에 수출한 토피카(Topica)는 2018년 싱가포르에서 5000만달러를 투자 유치했다. 베트남 1위 ICT 기업이자 IT 전문 종합대학을 운영하는 FPT는 초중등학교에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4만개 학교에서 300만개 계정이 활성화 중이다. 하노이를 기반으로 대학,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영어 교육 학원과 유학원까지 운영하는 이퀘스트(EQuest) 교육그룹은 미국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로부터 1억달러를 유치했다. 영어 발음을 향상시키는 애플리케이션을 운영 중인 엘사(Elsa)는 100개국에서 1300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구글의 벤처 캐피털을 비롯한 여러 전문 자회사들로부터 15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에듀테크 사업의 선두주자인 한국 교육기업들도 베트남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쉽사리 열리지 않고 있다. 외국 기업이 독자적으로 베트남 교육시장에서 사업을 벌이기에는 교육 라이선스와 각종 인허가 획득에 오랜 시간과 준비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한국 기업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합작사 형태로 현지 파트너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는 게 효율적이다. 교육 콘텐츠와 사업 운영 노하우를 공유하고, 현지 기업이 주체적으로 운영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 묘수라면 묘수다.

<유영국 「왜 베트남 시장인가」의 저자>

우리가 모르는 베트남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