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과학강국 원한다면 ‘사람’을 보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삼프로TV>라는 경제 관련 유튜브 채널에 이재명, 윤석열, 심상정, 안철수, 김동연 등 여야 대선후보들이 잇따라 출연해 각자 90분 정도 경제 현안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영상의 조회수는 후보에 따라 1월 13일 현재 적게는 27만, 많게는 671만회를 기록했다. 이 영상을 반드시 시청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대선후보들의 경제철학이 확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삼프로TV>에 출연해 경제정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여야 대선후보들. 사진 위쪽부터 이재명(더불어민주당), 윤석열(국민의힘), 심상정(정의당), 안철수(국민의당), 김동연(새로운물결) 대선후보 / 삼프로TV 캡처

<삼프로TV>에 출연해 경제정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여야 대선후보들. 사진 위쪽부터 이재명(더불어민주당), 윤석열(국민의힘), 심상정(정의당), 안철수(국민의당), 김동연(새로운물결) 대선후보 / 삼프로TV 캡처

유튜브는 영상매체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볍게 유튜브를 소비한다. 유튜브는 공익적인 내용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후보의 공약을 듣고 싶어하겠지만, 경제를 다룬 <삼프로TV>처럼 모든 분야를 소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기술처럼 국가의 존립에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학기술 분야엔 <삼프로TV>가 없다.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과학기술 6개 단체는 ‘대전환 시대에 과학기술 중심국가 비전 확립을 요구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대선후보들의 행보에서 과학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며 우려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를 비롯해 각종 한림원이 주축이 돼 작성한 이 성명서는 지난 수십년간 선거철이면 반복적으로 등장한 내용의 복사판이다. 과학기술에 투자하라는 주장이다. 한국은 이미 국민총소득 대비 연구개발비 규모에서 세계 1위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이런 투자는 엄청난 것이다. 연구개발비 투자로만 본다면, 한국 정부는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왔고, 또 다하고 있다.

박정희 패러다임

이재명 후보는 지난해 12월 22일 과학기술 분야 정책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과학기술혁신 부총리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고, 박정희·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며 과학기술 투자에 집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학기술 혁신전략을 국정과제 앞줄에 배치하고, 대한민국을 과학기술 강국으로 발돋움시키겠다고 했다. 문제는 대외적으로 이런 공약을 내세우지 않은 역대 정부가 없었다는 점이다.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문재인 대통령의 4차 산업혁명은 대통령의 이름과 어젠다 제목만 바꾸면 거의 똑같다. 이재명 후보의 공약도 마찬가지다. 저 공약에서 이재명이라는 이름만 지우면, 윤석열 후보의 공약이 된다.

왜 그럴까. 왜 한국 과학기술정책에는 좌우와 여야의 차이가 없을까. 그 이유를 박정희 패러다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을 정치적 생명 연장의 도구로 활용했던 박정희 시대에 만든 이 패러다임은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는 관점이며, 나아가 과학기술인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관리하는 기술이다. 이 관점은 아주 강력하게 한국사회를 장악했으나, 대부분은 이 패러다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박정희 패러다임이 얼마 전까지 완벽하게 잘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패러다임 속에서 한국은 연구개발비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했고, 과학기술계 인력 또한 엄청난 속도로 과잉배출했다. 정치인과 관료는 연구개발비라는 미끼로 과학기술계를 현혹하고 관리한다. 그렇게 정치는 과학기술을 종속시킨다. 문재인 대통령이 누리호를 다루는 방식과 박정희가 통일벼를 홍보한 방식은 같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단 한 분야에서 박정희의 망령에 갇혀 있다. 과학기술이다.

사람에 투자하라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과학기술 투자를 줄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혁신 부총리를 재도입하겠다는 이재명 정부도, 구글 정부를 만들겠다는 윤석열 정부도,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렁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과학기술계에 혁신이 일어날지는 미지수다. 박근혜의 창조경제도, 문재인 대통령의 4차 산업혁명도, 추상적 구호에 머물렀을 뿐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은 코로나19를 경험하며 우리 손으로 백신조차 생산하지 못하는 국가임을 알게 됐지만, 과학기술 관료들은 K방역과 K백신을 외치며 ‘국뽕’에 취해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말 과학기술이 한국사회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만 기억해주길 바란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과학기술정책은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짜야 한다. 연구개발에 엄청난 지원을 쏟아부어도 이공계 대학원이 텅 비는 이유는 과학기술 분야에 몸담은 선배들의 삶이 초라하기 때문이다. 연구개발직의 삶은 초라하다. 안정적이지도 않다. 딱히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도 모험적 연구개발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계 미국인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이 된 이유는 바로 H1B 때문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H1B란 미국의 취업비자다. 미치오 카쿠는 천재비자로 불리는 이 비자가 바로 미국이 세계 과학기술 인재의 용광로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인 동시에 실리콘밸리에 수많은 IT 인재가 몰려든 이유라고 말한다. 미국은 비자 하나 덕분에 과학기술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건 사실에 가깝다. 이민자 문제를 경시한다면, 향후 미국의 과학기술경쟁력엔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중국 또한 사람에 투자해 과학기술경쟁력을 높였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여년간 ‘천인계획’과 ‘만인계획’을 통해 해외에 산재해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중국으로 불러모았다. 이 두 계획의 핵심은 해외의 고급 인재가 중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연구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미국보다 더 많은 연구비와 월급 그리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한다. 외국인에게도 이 제도를 똑같이 적용한다.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외국인 과학기술자를 끌어들이는 용광로가 돼가고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정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원사 제도다. 중국 정부는 2년에 한 번씩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과학기술 분야에서 원사를 선정하며, 이들은 종신직으로 차관급 예우를 받는다. 이들은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소속 기관에서 연구할 수 있으며, 엄청난 연구비도 지원받는다. 연초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원로과학자를 예방하는 전통 또한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과학기술중심 정책의 상징이다. 시진핑 주석이 칭화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했을 정도로 중국은 이공계를 존중하며, 그들이 건설한 국가임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국도 2017년부터 과학기술유공자라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홈페이지가 있다. 각 후보는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란다. 최근엔 창조과학자를 유공자로 선정했다. 한국에서 과학기술자로 살아가는 건 처참한 일이다. 사람에 투자해달라.

<김우재 낯선 과학자>

김우재의 플라이룸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