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약은 인간의 똥에서 추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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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火藥)은 원래 약(藥)이었다’는 말은 그렇다 칩시다. ‘화약이 똥에서 나왔다’는 게 무슨 소리일까요.

국립진주박물관이 3월 22일까지 ‘화력조선’을 주제로 조선무기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요. 특별전 도록 원고를 받아봤는데 몇가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먼저 ‘화약(火藥)’이 당초에는 ‘약(藥)’으로 쓰였다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화약은 9~10세기 무렵, 중국 송나라 때부터 무기로 활용됐는데요. 그 이전에도 화약은 제조됐답니다. 화약은 염초(초석 혹은 질산칼륨·KNO3)와 숯, 유황을 혼합해 만들죠.

<신전자초방>과 염초의 원료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신전자초방>과 염초의 원료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약재로 쓰인 화약 화약은 도교사상이 유행한 중국 한나라와 위진남북조 시대에 연단술(煉丹術)의 하나로 사용됐는데요. 연단술은 금단(광물로 만든 약)을 조제·복용하는 신선도술이죠. 불로불사를 원한 도사들이 사용한 팔석(八石: 염초·주사·웅황·운모·공청·유황·융염·자황) 중에 화약의 재료인 염초(초석)와 유황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초석과 유황 같은 화약 재료가 왜 도교에서 신성시됐을까요. 단약을 만들려면 여러 재료를 청동솥에 넣고 끓여야 합니다.

그 재료가 화약 재료(염초·유황)라면 산화재인 염초와 연소 온도를 낮추는 유황의 화학작용으로 자연스레 불꽃이 튀는데요. 자연에서 얻는 물질이 불꽃을 튀기는 모습을 보면서 신비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 때문인지 화약은 무기로 개발된 이후에도 약재로 사용됐습니다. 명나라 시대 의서인 <본초강목>은 “화약을 장티푸스 등 열병 치료제로 쓴다”고 했고, 허준(1539~1615)의 <동의보감>도 “염초 성분을 포함한 ‘아궁이 속 흙’과 ‘지붕 아래 먼지’ 등이 약재로 쓰인다”고 기록했습니다.

역관 김지남이 비밀리에 가져온 비법 ‘조선의 의성(醫聖)’이라는 허준은 왜 ‘아궁이 속 흙과 지붕 아래 먼지’ 등을 장티푸스 치료약으로 언급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약재로 쓰든, 무기에 쓰든 화약제조를 위해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것은 염초(초석 혹은 질산칼륨)였습니다. 숯(목탄)은 자체수급이 가능했고, 유황은 화산섬인 일본에서 수입하면 됐습니다.

그러나 화약 제조를 위해 70% 이상 드는 염초는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인도나 남미 같은 곳에서는 새나 박쥐 등의 분뇨가 광산처럼 널려 있어 구하기 어렵지 않았는데요. 유럽에서도 인분을 쌓아둔 염초밭을 조성해 질산염을 대량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는 분뇨광산, 염초밭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이나 동굴, 마루 밑, 아궁이, 처마 밑 속 흙 등에서 염초 성분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취토장(取土匠)이라는 기술자를 두어 각 집안 곳곳의 먼지와 흙 등을 긁어모았습니다.

이런 곳의 흙에는 쥐, 개, 닭과 같은 동물의 분뇨와 재, 석회 등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모은 염초가 얼마나 됐겠습니까. 필요한 염초량은 흙의 1%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관 김지남(1654~?)이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자초신방>이라는 책이 고민을 단번에 해결했답니다. 화약제조법은 국가기밀이었죠. 통역관을 맡아 중국을 방문한 김지남은 ‘염초 구하는 비법’이 적힌 이 책을 입수해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동물의 분뇨 같은 오물에서 염초를 얻는 과정. 분뇨를 잿물과 섞어 여러차례 끓인 뒤 졸여서 생기는 결정을 얻는다. 한마디로 똥이 화약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동물의 분뇨 같은 오물에서 염초를 얻는 과정. 분뇨를 잿물과 섞어 여러차례 끓인 뒤 졸여서 생기는 결정을 얻는다. 한마디로 똥이 화약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똥흙에서 화약을 추출하라 김지남은 이렇게 들여온 <자초신방>을 토대로 <신전자초방>이라는 28쪽짜리 책을 펴냈는데(숙종 24·1698) 이 책에 적힌 ‘염초 구하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길가에 널려 있는 흙에서 염초의 원료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똥흙’이었습니다. 허무개그 같죠.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8~19세기까지는 길가에 똥과 오줌을 마구 버렸거든요. 서양의 하이힐 원조가 중세 유럽에서 똥천지인 거리를 오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든 굽 높은 구두였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죠.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서울에서는 오줌을 마구 내다버리므로 우물물이 짜고, 냇다리의 석축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어 있다”(<북학의>)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똥천지였던 거리의 흙이 염초밭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겁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이제는 남의 집 화장실이나 마루·처마 밑에 들어가 흙을 긁어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정조의 개인 문집(<홍재전서>)과 <정조실록>(1796년 5월 12일)은 “이제 길가의 흙에서 마음껏 염초를 구하게 됐다”면서 “숙종 때 인쇄·반포한 책 <자초신방>은 영원히 준수하고 따라야 할 금석과 같은 성헌(成憲·헌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렇게 얻은 ‘똥흙’에서 어떻게 염초가 만들어질까요. 똥흙을 잿물과 섞어 끓인 뒤 졸여 생기는 결정을 얻어내는 건데요.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염초(초석)는 질산칼륨(KNO3)입니다. 발효된 생물의 분뇨(질산염·NO3)가 주원료거든요. 이 분뇨(질산염·NO3)와 칼륨(K)이 다수 함유된 재나 석회가 잘 섞이고 발효돼야 염초(KNO3)가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똥’이 ‘염초’로, 아니 ‘똥’이 화약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최초의 시한폭탄 개발하다 조선의 무기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비격진천뢰’라 할 수 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 과학자인 이장손이 발명한 당대 조선의 독창적인 최첨단 무기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관(발화) 장치가 있어서 목표물까지 날아가 폭발합니다. 폭발할 때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그리고 수많은 파편(마름쇠·삼각형 형태의 쇳조각)을 쏟아내는 작렬탄이었습니다. 시간을 조절해 폭발한다는 면에서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는데요.

비격진천뢰의 원리 구조는 의외로 간단합니다(<융원필비>·1813). 둥그런 무쇠 속에 대나무통(竹筒)을 꽂고 대나무통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木谷)에 도화선을 10~15번 친친 감습니다. 이어 별도로 뚫은 무쇠 구멍 안에 화약과 마름쇠(삼각형 쇠), 흙을 잔뜩 넣고 화포에 장착합니다. 그런 다음 비격진천뢰의 도화선과 화포의 도화선에 차례로 불을 붙인 다음 발사하는데요. 10~15번 감은 도화선이 폭발시간을 조절하게 됩니다.

도교의 도사들이 조제 복용했다는 팔석(八石), 즉 8가지 광석. 웅황과 운모 주사, 자황, 공청, 융염, 염초(초석), 유황이다. 화약이 무기로 사용된 후에도 계속 약재로 쓰였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도교의 도사들이 조제 복용했다는 팔석(八石), 즉 8가지 광석. 웅황과 운모 주사, 자황, 공청, 융염, 염초(초석), 유황이다. 화약이 무기로 사용된 후에도 계속 약재로 쓰였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국립진주박물관이 2018년 11월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에서 발견된 비격진천뢰 11발을 최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았는데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비격진천뢰의 벽 두께가 부위마다 달랐습니다. 비격진천뢰를 제작할 때의 쇳물 주입구와 살상용 쇳조각 및 심지를 꽂아넣는 뚜껑 부분은 두껍게 한 반면, 몸체의 측면은 상대적으로 얇게 설계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비격진천뢰의 제작 때 쇳물 주입구와 뚜껑 부분은 두껍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 부위가 자칫 적진에 떨어지기도 전에 폭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반면 몸체의 측면은 얇게 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표물에 떨어진 비격진천뢰가 그 얇은 부분으로 일시에 터질 수 있게 돼 살상력을 배가시키니까요. 즉 쇳물 주입구와 뚜껑 부분은 강하게(단조기법) 만들어 도중에 터지지 않게 하고, 본체는 잘 깨지도록(주조기법) 제작해 떨어진 뒤에 쉽게 터질 수 있도록 이중으로 설계한 겁니다. 또 발굴된 비격진천뢰의 뚜껑을 분석한 결과 심지 구멍을 2개 만들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혹시 불발탄이 나올까봐 이중으로 꽂은 심지에 불을 붙인 거죠. 이러한 시한폭탄은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없는 최첨단 무기였습니다.

귀신폭탄의 위력 비격진천뢰는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일종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는 보통 적진에 떨어진 직후에 천둥 번개와 같은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파편(마름쇠)이 사방으로 흩날리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1592년 9월 1일)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서애집>이 비격진천뢰의 진가를 설명합니다.

“비격진천뢰가 경주성 안에 떨어졌다. 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했다. 왜적들은 비격진천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갑자기 폭발했다.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이 파편을 맞고 즉사한 자가 20~30명 됐다. 이튿날 아침 적병이 성을 비운 채 도주함으로써 경주가 수복됐다.”

비격진천뢰는 심지의 길이에 폭발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목곡)에 심지를 10번 감느냐, 15번 감느냐에 따라 폭발시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격진천뢰를 시한폭탄으로 한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비격진천뢰는 심지의 길이에 폭발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목곡)에 심지를 10번 감느냐, 15번 감느냐에 따라 폭발시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격진천뢰를 시한폭탄으로 한다.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유성룡은 “비격진천뢰포 하나의 위력이 수천명 군사보다 낫다”고 칭찬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비격진천뢰가 터지자 왜군의 진중에서 놀라고 두려워서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일본군은 비격진천뢰를 ‘귀신폭탄’이라 하며 부들부들 떤 겁니다.

비단 경주성 전투뿐이 아니고요. 1592년 10월의 진주대첩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김성일(1538~1593)은 “진주성 전투에서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죽은 적군의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다”(<학봉집>)고 보고했습니다. 행주산성 전투(1593년 2월)와 남원성 전투(1597년 8월)에서도 “비격진천뢰로 적군을 막았다”(<선조실록>·<난중잡록>)는 기록이 나옵니다. 의병장 김해(1555~1593)의 <향병일기>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했고요.

일본 측도 조선의 비밀병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 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조선역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하다”면서 “그것은 화공술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이름 없고 빛도 없던 무기개발자들 곰곰이 따져보면 화약과 무기개발과 관련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몇분 계시죠.

무려 16종의 무기를 제작한 최무선(1325~1395)과 최무선의 아들이자 신기전(로켓추진화살) 등을 개발한 최해산(1380~1443)이죠. 두분 말고도 대마도(對馬島·쓰시마) 정벌 때 무장쾌속선을 개발한 이천(1376~1452)이 있죠.

이렇게 과학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조차 문신들에 비해서는 각박한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뿌리 깊은 ‘문과 우대’의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분들은 낫습니다. 1591년 당시 최고의 첨단무기를 발명한 이장손 관련 사료는 어떨까요.

1592년(선조 25) 9월 1일에 있었던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선조수정실록>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등장할 뿐입니다. 비격진천뢰 덕분에 경주성을 수복했다는 전과를 설명하고 박진이 가선대부(종 2품)로 승진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다음 ‘( )’ 형식으로 이장손의 존재를 살짝 첨언합니다.

“(비격진천뢰는 그 제도가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대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달랑 이 내용뿐입니다.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로 남았습니다.

뭐 비단 이장손뿐 아니죠. 중국에서 목화를 몰래 들여온 문익점(1329~1398)은 알지만, 염초 제조 서적을 몰래 가져온 역관 김지남이라는 인물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이번 진주박물관 특별전을 계기로 실록이나 주요 문헌에는 실려 있지 않은 무기기술자들의 이름을 한분 한분 거론하려 합니다. 이분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총통 등 무기에 이름을 새긴 기술자들입니다. 그분들의 분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천중원, 김우경, 막금, 신산, 희손, 준금….’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o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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