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종의 용인술, 신하들 재능 탈탈 털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2월 31일까지 매우 의미심장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출토된 세종 시대 등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옥루(자격루),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같은 과학기구 부품 등 금속유물 1775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나면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6월부터 서울 인사동 출토 유물 기사를 준비하면서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으로 읽은 실록 기사가 있었습니다.

세종 연간인 1437년 발명한 일성정시의.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을 관찰해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고, 그에 맞게 발명한 24시간 주야시계인 일성정시의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 연간인 1437년 발명한 일성정시의.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을 관찰해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고, 그에 맞게 발명한 24시간 주야시계인 일성정시의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의 글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 1437년 4월 15일자 <세종실록>인데요.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1385~1440)이 천문기구 일성정시의의 발명 내력과 원리를 쓴 기록입니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입니다. 낮에 태양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죠.

김돈이 세종의 명을 받아 옮긴 일성정시의의 원리는 제 깜냥으로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입니다. 그래서 ‘아니 얼마나 천문학에 통달했으면 저런 해설을 달 수 있을까’ 하고 승지 김돈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반전의 내용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과인의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하지만 임금의 설명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 내(김돈)가 단 한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세종께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및 작동 원리를 꿰뚫고 계셨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김돈이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던 임금 다른 실록 기사 하나도 떠올렸는데요,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입니다.

“임금(세종)은 늘 ‘난 말야. 책을 본 뒤에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어’라 했다. 그 총명함과 학문 좋아하심은 천성이었다. 임금은 수많은 신하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 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몇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 활자들. 인사동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가운데는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가 여럿 보였다. 세종은 개발에 성공한 갑인자를 20만자 주조했으며, 하루에 40여장 찍을 정도 조판 인쇄 기술도 향상됐다고 좋아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 활자들. 인사동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가운데는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가 여럿 보였다. 세종은 개발에 성공한 갑인자를 20만자 주조했으며, 하루에 40여장 찍을 정도 조판 인쇄 기술도 향상됐다고 좋아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기사만 볼 때는 ‘천재 임금의 애교 넘치는 자뻑’ 같죠. 아닙니다. 아까 언급한 1437년 4월 15일의 실록 기사를 보십시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공부에 관한 한 세종의 자부심도 대단했는데요.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면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황희·맹사성 투톱 죽을 때까지 활용하다 딱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맞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부려먹었답니다. 임금이 주야장천 근정전에 앉아 있으니 원로대신들까지 퇴근 후 집에 가서도 관복을 벗지 못했답니다. 임금이 언제 부를지 몰랐기 때문이죠.

가령 세종은 1427년(세종 9) 1월 황희(1363~1452)를 좌의정, 맹사성(1360 ~1438)을 우의정에 발탁하는 인사쇄신을 단행하는데요. 승하한 선왕(태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죠. ‘황희-맹사성 투톱’은 1435년(세종 17) 맹사성이 76세의 나이에 은퇴할 때까지 8년간이나 지속됩니다.

황희는 또 어떻습니까. 1449년(세종 31)까지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하다가 87세의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세종은 은퇴한 두 분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맹사성·황희 두 분은 약속이나 한 듯 은퇴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맹사성이 79세(1438년), 황희는 90세(1452년)였습니다.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죽을 때까지 활용했던 셈이죠.

세종에게 탈탈 털린 이천 신하의 재능을 늙을 때까지 뽑아낸 예가 또 있습니다. 무관 출신의 과학자인 이천(1376~1451)인데요. 세종은 1420년(세종 2) 이천을 불러 “(태종 때 주조한) 활자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당시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으로 주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완성된 활자가 네모반듯하지 않고 모래알갱이가 붙어 있어 주조 상태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활자를 주조했어도 조판 활자들을 고정하는 일도, 흔들림 없이 인쇄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판틀 밑에 밀랍(꿀찌꺼기)을 펴서 그 위에 글자를 배열한 뒤 인쇄했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겨우 두어장만 찍어내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세종이 이천에게 “당신이 해보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활자 주조와 조판·인쇄 때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이천이 난색을 표했지만 세종은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맡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명을 받은 이천은 나름 온갖 방법을 짜내 급기야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는데요. 이것이 경자년(1420년)에 주조된 ‘경자자’입니다. 경자자의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세종이 만족할 리 없었습니다. 세종은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 다시 이천을 소환합니다. 당시 이천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습니다. 이천으로서는 나이도 많고, 더 이상의 활자 개발도, 조판·인쇄 때 고정할 방도를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굽니까. 맹사성·황희 같은 분도 칠순·팔순이 넘도록 ‘쓰셨는데’, 환갑도 안 된 이천이 감히 명을 거절할 수 없었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죠.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 갑인자로 찍어낸 <동국정운>(국보 71호) ②1438년(세종 20) 간행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해 배포한 <자치통감>(보물 1281-2호) / 간송미술관 소장 / 아단문고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 갑인자로 찍어낸 <동국정운>(국보 71호) ②1438년(세종 20) 간행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해 배포한 <자치통감>(보물 1281-2호) / 간송미술관 소장 / 아단문고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4년 만에 어쩔 수 없이 임금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성과를 이뤄냅니다.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고, 조판·인쇄 때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조판한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 곳을 대나무로 끼워 고정한 겁니다(<용재총화>). 이것이 갑인년(1434년)에 개발한 ‘갑인자’입니다.

갑인자 개발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 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 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그 갑인자가 이번에 인사동에서 출토된 겁니다. 아닌 말로 이천이야말로 세종에 의해 그 능력이 ‘탈탈 털린 인재’였던 거죠.

세종은 금속활자의 개발에만 이천을 활용한 게 아닙니다.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등도 실무 제작했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평가받은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었습니다. 세종도 대단하지만, 그런 세종의 끊임없는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이천이라는 분도 참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호의호식하는 너희보다 낫다” 사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천문관측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죠. 예부터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세종은 가만있지 않았죠. 1420년(세종 2) 첨성대를 세우고 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합니다. 은퇴 후 고향(장흥)에 낙향한 전 관상감 윤사웅(생몰년 미상)에게 역마를 보내 “이걸 타고 당장 상경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낙향한 은퇴관리에게 관용차를 보낸 셈이죠. 그렇게 재발탁한 윤사웅 등 천문 관리들을 경기 남양(화성)·광주·부평·인천 등의 수령으로 임명합니다.

서울 부근에 있어야 천재지변이 뜻밖에 일어나면 재빨리 상경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저 미천한 무리를 큰 고을의 수령으로 발탁하다니 말도 안 된다. 빨리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밤잠을 자지 않고 천문을 관측해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는 이들과 편히 호의호식하는 너희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일축해버립니다.

세종의 시대에 부응한 장영실·박연 그렇다면 장영실(생몰년 미상)은 어떨까요.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 관노 출신이었습니다. 세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1421년(세종 3) 장영실을 관상감으로 불러 혼천의 제도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답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임금의 지혜를 받든 장영실의 기묘한 솜씨는 임금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해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합니다.

인사동에서 출토된 옥루(자격루)의 부품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인사동에서 출토된 옥루(자격루)의 부품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은 “장영실 등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국에 들어가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 빨리 모방해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장영실은 역시 천재 군주 세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눈썰미였습니다. 1년 뒤 돌아온 장영실 등은 눈대중으로 외우고, 그려온 중국 흠경각과 보루각의 도해도를 바탕으로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썰미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다니 기이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 시대에 예악을 정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박연(1378~1458)은 어떤가요.

세종은 일찍이 “율관(음악에 쓰이는 기본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대나무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만이 할 수 있다”면서 “악기를 박연에게 맡기면 소리와 가락(리듬)을 알아낼 것”이라고 신뢰감을 안겼습니다. <용재총화>는 “(세종 연간의) 사람들은 (박연과 장영실 등을 두고) 모두 세종의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들”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답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신하들 이분들만이 아니죠.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와 김담(1416~1664),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죠.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론한 인물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입니다.

하기야 천재 임금과 천재 신하들뿐이 아닙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재위 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 4월 29일자)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인 세조(수양대군·1417~1468, 재위 1455~1468)는 갑인자 가운데서도 대자(큰 글자)를 썼습니다. 세조의 글씨를 새긴 ‘대자 갑인자’를 주조했다는 얘기죠.

어떻습니까. 세종 연간에는 세종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죠.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와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을 발명한 겁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정치가, 천재 관리, 천재 과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세종 시대가 재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이기환의 Hi-story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