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담배시대 저물어도 저물지 않을 ‘자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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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도착해 공항터미널을 빠져나오면 민감한 사람들은 뭔가 모를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점차 강하게 풍기는, 향기라고 칭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쾌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냄새의 정체는 향신료 혹은 크레텍(Kretek)이라고 부르는 정향(clove) 담배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정향 담배는 일반 담배와 어떤 차이가 있어 인기가 있고, 대표업체는 어디일까.

수작업으로 크레텍을 만드는 모습

수작업으로 크레텍을 만드는 모습

크레텍은 일반 담뱃잎에 정향과 여러 향료가 포함된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담배로, 기원은 1880년대로 올라간다. 중부 자바 지역의 쿠두스에 살던 하지 잠하리(Haji Djamhari)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가슴 통증을 완화시키고자 향신료 기름을 바르다가 이를 흡입하면 효과가 더 좋지 않을까 해서 담배와 같이 말아 피웠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소문이 나면서 정향을 말아피우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렇게 크레텍이 탄생했다.

‘정향 담배’가 열어준 투자 기회

처음 크레텍은 그 효능에 대한 소문 때문에 의약품처럼 여겨졌다. 크레텍을 피우면 정향 때문에 매우 독특한 향이 날 뿐만 아니라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나는데 크레텍이라는 이름은 그 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 냄새를 처음 맡는 사람들은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 독특한 향과 맛 덕택에 크레텍은 오랫동안 세계로 수출되는 인도네시아 상품 중 하나였다.

무슬림이 전체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인도네시아는 음주에는 까다롭지만 담배에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편이라 금연 바람이 불어오기 전까지 흡연자들의 천국과 같았다. 인도네시아 인구가 무려 2억7000만명에 달하는데 15세 이상 인구 중 거의 30%가 흡연자로 분류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담배 소비자 중 80%가 크레텍을 피운다. 크레텍은 일반 담배보다 세금이 낮아 가격도 싸다. 당연히 자국기업이나 외국기업 모두 인도네시아에서는 크레텍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KT&G도 크레텍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옛날 크레텍 모습 / 고영경 제공

옛날 크레텍 모습 / 고영경 제공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크레텍 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는 누구일까. 대표적인 인도네시아 기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룸이다. 자룸 창업자는 중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온 화교의 후예 오에이위관(黃維源)이다. 그는 자바 중부 소도시에서 태어나 폭죽판매로 자리를 잡았지만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폭죽공장은 문을 닫았다. 오에이는 쿠두수의 작은 크레텍 제조공장을 인수했다. 시장에서 품질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급적 직원들과 같이 직접 담배를 생산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 결과 오에이의 상품은 지역에서 괜찮은 담배로 소문이 났고, ‘자룸(바늘)’이라는 브랜드를 붙이면서 강한 이미지를 심었다. 품질과 브랜드 효과 덕분에 자룸 크레텍은 시장에서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인도네시아 크레텍 시장을 이끄는 기업 자룸의 상품 / 고영경 제공

인도네시아 크레텍 시장을 이끄는 기업 자룸의 상품 / 고영경 제공

1963년 공장이 소실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자룸은 국내 시장을 확대하고, 이어 동남아 인근지역과 미국 등 해외시장까지 진출하며 승승장구했다. 크레텍을 생산하는 업체가 수백개가 있었지만, 오에이의 두 아들 부디와 마이클 하르토노 형제가 이끄는 자룸은 1980년대 대표업체로서 선두권을 지켜냈다. 담배사업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던 자룸은 1997년 발생한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오히려 사업다각화 기회를 잡았다. 당시 인도네시아 대표 상업은행인 BCA(Bank Central Asia)는 환율상승(루피아 가치하락)을 견디지 못하고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정부 자산관리회사로 넘어갔다.

하르토노 형제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BCA 지분 51%를 인수하며, 금융사업에 발을 디뎠다. 위기 상황에서 자룸은 낮은 비용으로 단숨에 금융계 거물로 부상했다. 금융사업에 이어 건설 부문에도 뛰어들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그랜드 인도네시아 슈퍼블록 프로젝트에 참여해 자카르타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 인도네시아의 리노베이션과 쇼핑몰 개발 등을 수주했다.

자룸이 인수한 인도네시아 대표 상업은행 BCA의 전경 / 고영경 제공

자룸이 인수한 인도네시아 대표 상업은행 BCA의 전경 / 고영경 제공

테크·스타트업 투자로 미래 대비

최근 하르토노 가문과 자룸의 행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테크 분야와 스타트업 투자다. 자룸은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글로벌디지털 프리마벤처(GDP Venture)를 설립했으며, 이는 부디 하르토노의 아들 마틴이 이끌고 있다. GDP 벤처의 대표적인 성과로는 2016년 동남아 게임 유니콘 가레나(Garena) 투자를 꼽을 수 있다. 가레나는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이후 대략 300%의 폭발적인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 소셜커뮤니티와 이커머스에 관심이 많은 GDP벤처는 블리블리(BliBli)라는 이커머스 플랫폼을 운영하는 글로벌 디지털 니아가(PT Global Digital Niaga)에도 투자했다. 한국에서도 많이 보도된 사례로는 핀테크 업체 세르마티 투자가 있다. 세르마티는 2015년 설립된 핀테크 업체로 신용카드와 대출, 보험 등 금융 상품 정보제공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자룸은 담배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담배사업에서 벌어들인 엄청난 수익이 없었더라면 위기상황에서 BCA를 인수하는 리스크를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설립자 오에이의 아들 부디 하르토노와 마이클 하르토노는 포브스가 선정한 인도네시아 최고 부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담배사업은 향후 미래가 낙관적이지는 않다. 인도네시아에서 금연구역이 확대되는 등 흡연자 줄이기를 위한 노력이 전방위로 강화되고 있고, 무엇보다 크레텍에 부과되는 담뱃세가 인상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룸의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다각화는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금융과 부동산 개발 및 건설 부문에서 성장해왔고, 향후 전망도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가족 경영이 늘 환영받지는 않지만, 허름한 식당에서 혼밥을 즐기는 소탈한 모습이나 인도네시아 국민스포츠인 배드민턴을 육성하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온 덕택에 하르토노 형제는 호감형 경영자로 인식되고 있다. 스타트업이나 기술기업 등 미래사업 투자를 이끄는 다음 세대는 과연 자룸의 새시대를 열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고영경 선웨이대 비즈니스스쿨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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