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무대 위의 ‘니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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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갈매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더불어 가장 자주,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는 연극계의 스테디셀러다. <갈매기>는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이 작품 자체가 바로 ‘연극에 대한’, 그리고 ‘연극을 위한’ 연극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 지망생으로 등장하는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는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어하는, 꿈의 배역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모든 <갈매기> 프로덕션에서 니나는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캐릭터이며, 오디션장에서도 니나의 대사를 준비해온 배우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연극 <분장실> / T2N미디어

연극 <분장실> / T2N미디어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 <분장실>에 등장하는 4명의 여배우도 모두 ‘니나’ 역을 꿈꾸고 동경한다. 극 안에서 실제로 니나 역을 맡아 무대에 서는 것은 배우 C뿐이지만, 나머지 배우들도 모두 니나의 대사를 달달 외우고 있다. 특히 배우 B는 틈만 나면 니나의 대사를 읊고 연습 중에도 니나의 감정에 이입해 울음을 터뜨리는 등 중증의 ‘니나앓이’를 보여준다. 또 배우 D는 현재 니나를 공연 중인 배우 C의 언더스터디지만, 니나 역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져 어느 순간 배우 C가 자기 역할인 니나를 빼앗아갔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배우 A 역시 한 번도 니나 역을 맡지는 못했지만 오랜 프롬프터 생활로 니나의 대사를 모두 외우고 있다.

이들은 왜 이토록 ‘니나’ 역할을 사랑하는 걸까. <갈매기>의 니나는 분명 청순하고 매력 넘치는 아가씨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비극적인 인물이다. 4막의 그는 사랑했던 이에게 버림받고 연기자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삼류 배우로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한 니나가 읊조리는 4막의 대사는 그 어떤 화려하고 장엄한 대사보다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준다. “난 갈매기예요. 아니, 난 배우예요. … 나는 이제 알아요. 중요한 것은 명예가 아니라 내가 동경하던 그 눈부신 명성이 아니라 참는 능력이라는 걸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는 거라는 걸요.” 삶에 지치고 피로에 찌들어 있지만, 니나의 대사에는 막연하게 동경했던 ‘배우’의 겉모습이 아니라 진짜 무대를 버티고 살아가는 예술가로서의 신념이 묻어난다.

연극 <분장실>의 배우들이 진정으로 동경하는 것은 젊고 예쁜 주인공으로서의 니나가 아니라 바로 이렇듯 단단한 내면과 신념을 지닌 여배우 니나의 형상이다.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무대와 연극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잃지 않는 니나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삶을 (그리고 삶 이후를) 지탱해주는 힘이자 긍지이다. 모두 배우로서 영광과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은 여전히 이곳, 분장실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매일같이 대사를 외우고 무대를 꿈꾸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배우로서의 긍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사실 이들 네 사람은 이미 ‘니나’의 꿈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다. 무대 위가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진실하게 ‘니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

<김주연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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