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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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기사들이 있습니다. 대일항쟁기 피해자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일제가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사연은 극적일수록 좋습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데 감정을 동요시키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해 더 자극적인 피해를 찾아 헤매는 사이 어느새 피해 사실에도 등급이 정해졌습니다. 대일항쟁기 피해자 사연을 읽으며 ‘에이, 그 정도 피해는 그 시대에 당연한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만큼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김찬호 기자

김찬호 기자

인천육군조병창(부평 조병창) 기사를 쓰며 두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8월 15일에 맞춰 쓰지 않는다’, ‘부족한 지면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한 사연을 나열하지 않는다’. 취재 과정에서 “대표적인 피해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막힌 사연 하나를 기사에 넣는다면 더 많이 읽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이내 거절했습니다. 90대인 피해자를 만나 이미 몇 번이나 말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연이 아닌 ‘사실’, ‘객관적 증거’만으로 피해자들도 몰랐을 기사를 쓰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부평 일대를 돌아다니며 일제강점기 흔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결과적으로 두차례에 걸친 부평 조병창 기사에는 피해자 사연은 하나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부평 조병창의 역사적 가치, 조병창 건물 철거를 둘러싼 국가기관의 책임 미루기, 일제의 극비문서 공개와 분석 등만 담았습니다.

기사가 공개되는 순간까지 ‘이 길고 딱딱한 내용을 누가 읽을까’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가 기사를 읽고, 부평 조병창 보존을 위한 행동에 나서주었습니다. 한 고3 학생은 국민신문고에 “부평 조병창을 보존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고 연락해주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동일한 내용의 글이 올라갔고, 청원 동의를 받고 있습니다. 지역에서도 철거 반대 성명 발표를 위한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이 모든 노력은 8월 첫째 주에 철거됐을 부평 조병창 건물을 현재까지 존속시키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취재를 하며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적어도 시민은 대일항쟁기 피해에 대해 ‘이런 사실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 무시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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