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합격입니더!” “합격이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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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멘토링 시간에 김규환 명장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대우중공업에서 ‘시다’로 시작해 노력과 기술만으로 인정받은 사나이의 인생 이야기였다. 교수는 이 사례를 들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1970년대 중후반의 허술하고 거친 시대상을 현재에 갖다 붙이는 건 옳지 않다. 바뀐 시대는 읽지 않고 산업화의 로망만을 강조하는 ‘꼰대 소리’일 뿐. ‘도전’으로 포장하는 수많은 사례가 현대에 들어선 위법이지 않은가. 하지만 분명 시간을 뛰어넘어 전달받은 가치는 있었다. 바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간절함이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빚을 진 상태에서 기술 공부를 한다는 건 도박이었다. 요즘 시대에 ‘아무 회사 들어가 몇년 고생하다 기술 전수하고 정년까지’의 서사는 공상에 불과했다.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알음알음 알아본 결과, 정부에서 ‘취업 성공 패키지’를 운영한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처음 고용센터에 갔던 그날. 앉을 자리 하나 없이 북적대는 풍경에 서글픔과 위로감을 느꼈다. ‘대한민국 참 어렵구나. 그래도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서류 작성과 유의사항 숙지 후 좋은 곳에 취업 바란다는 담당 직원의 덕담 속에서 용접학원을 등록했다.

‘용접 덕질’을 하게 될 줄이야

첫 등원하던 날, 원장과 상담을 했다. ‘자격증 딸래, 아니면 실무교육을 받을래.’ 자격증을 배우려면 모든 용접을 일정수준 배워야 했다. 반면 실무는 하나의 용접만 배워 실전투입에서 바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즉 회사 들어가긴 편한데 ‘안에서 고생할래, 아니면 들어가긴 힘들어도 안에서 좀 편할래’의 갈림길이었다. 고민 없이 자격증을 택했다. 경력이 없는데 무슨 방식으로 실력입증을 하겠는가.

학원등록을 마치고 빈 용접기 손잡이를 잡았다. 첫 학습은 고무판에 물 뿌리고 손잡이를 갖다 대면서 시작했다. 손목을 아래위로 흔들어 손잡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용접의 시작이자 끝인 ‘위빙’이었다. 강사는 고무판에 상어 지느러미 모양이 쭉 이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손목은 아팠고, 손잡이는 전진하질 않았다. 일주일 동안 지겨운 짓만 반복했다.

취업 성공 패키지 기간 아르바이트를 못 하니 생계유지는 더욱 힘겨워졌다. 버스비도 아까워 매일 2시간씩 뜀걸음으로 학원을 오갔다. 점심은 마트 마감 세일로 파는 1+2 떡. 이미 다 팔려나갔을 땐 근처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이따금 형님들이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인간극장에서 진지하게 섭외요청이 올 법한 시기였는데도 의외로 괴롭다는 느낌은 없었다. 용접면을 쓰고 땜질 시작하자 현실을 의식할 틈이 없었다. 온 신경이 좁디좁은 유리판 너머 불꽃에 몰렸다.

세개의 용접을 배웠는데 그 느낌이 모두 달랐다. 야외에서 사용하는 아크(ARC) 용접은 거칠고 시끄러운 ‘날것’의 느낌, 예민한 금속에 쓰이는 티그(TIG) 용접은 한땀 한땀 신중하게 철판 사이를 바느질하는 느낌, 반대로 조선이나 중공업같이 튼튼한 장비에 쓰이는 CO2 용접은 빨리빨리 치고 나가야 하는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특성과 분야가 달랐고 각자의 손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성장해나가는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단지 돈이 걸린 일이어서가 아니라 오래 또 재미있게 해나갈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때부터 용접은 생존요소가 아닌 ‘덕질’이 됐다. 손만 놀리는 게 아니라 집에서 자격증 책을 달달 외우고, 인터넷에서 전년도 문제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벼랑 끝 간절함이 걸어준 메달

학원에 다닌 지 두달여, 산업기사 자격증 필기시험이 다가왔다. 준비를 전부 마쳤던지라 시험지 넘기며 눈짓할 때 이미 깨달았다. 필기는 걱정할 필요 없겠다. 20분도 안 걸려 OMR(광학식 마크 판독기)카드에 답을 쓰고 나왔다.

문제는 역시 실기시험, 하루 3시간의 실전은 너무 부족했다. 필기처럼 집에 돌아와 더 공부할 수도 없었다. 이번 실기에서 떨어지면 다음 기회는 전무했다. 용접학원 등록금은 비쌌고, 취업 성공 패키지에서 지원하는 금액은 벌써 한도에 달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벼랑 끝에 몰린 듯 간절했다. 고민 끝에 원장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원칙적으론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제발 저녁까지 용접 좀 하게 해달라고. 허락해주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원장은 흔쾌히 승낙했고, 덕분에 한달을 오롯하게 시험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다.

시험 접수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교통편이 나빠도 시설은 최고인 장소를 찾아다녔다. 수소문 결과 부산 기장군 폴리텍대학이 가장 용접기 상태가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 왕복 5시간이나 걸리는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리 사전답사하고, 준비물을 철저히 갖춘 채 준비를 끝마쳤다. 마침내 오전 시험날, 제대로 잠을 못 자 몽롱한 머리를 긴장감이 지탱하는 상태로 시험에 들어섰다. 수험생 모두가 작업 지침서를 본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어려운 TIG 용접이, 가장 어려운 위보기 자세로 출제됐다. 기능장 시험에서나 나올 법한 최고 난이도 시험이 나온 셈이다. 최대한 분전했지만 결국 열이 가득 찬 스테인리스판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터덜터덜 불합격을 예감하며 돌아오는 동안 들숨은 시렸고, 침은 쓰디썼다. 다음날 학원 분위기도 썩 좋지 않았다. 시험에 도전한 대다수가 불합격을 예감했다. 종강을 보름 앞둔 학원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열정 가득했던 4개월 전의 풍경이 어쩐지 꿈처럼 느껴졌다. 애꿎게도 종강하는 날이 자격증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다들 휴대폰으로 자기 이름을 검색했다. 환희는 거의 없었고, 입맛 다시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놀랍게도 92점으로 합격이었다. 차마 자랑질하고 다닐 순 없었기에 조용히 학원을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합격입니더!” “합격이라꼬?”

종강식은 아구찜집에서 열렸다. 학원생들 앞에 소맥이 놓이고 두잔쯤 돌렸을 무렵. 원장이 화장실에 갈 때 조심스레 따라갔다. “운 좋게 자격증을 땄고 원장님의 배려 덕”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원장은 “몇년은 힘들 거다. 버티기만 하면 절대 어디 가서 굶어 죽지 않는다. 잡생각하지 말고 일에 집중해라.” 건조한 덕담과 함께 등을 힘차게 두드려줬다.

2015년 5월의 막바지, 산업인력공단에서 자격증을 받아오는 도중에 이력서 넣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출근할 수 있냐는 문자였다. 흐름이 하도 매끄러웠던지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내 인생도 지금부터 잘 풀리지 않을까? 김규환 명장처럼 멋들어진 ‘장이’의 삶이 시작되지 않을까? 잔뜩 쏟아져 내리는 꿈에 젖어 승낙 답장을 보냈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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