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남북불교와 문화유산 사반세기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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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4대 사찰로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가 꼽힌다. 이중 표훈사를 제외하고는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모두 파괴됐다. 신계사는 강원도 고성군 신복면 창대리 금강산에 있는 사찰이다. <금강산 신계사 사적>에 의하면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5년(519)에 보운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2019년 촬영한 복원된 신계사 / 이태호 제공

2019년 촬영한 복원된 신계사 / 이태호 제공

영조(1757년경) 때 간행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당시 신계사는 11개의 전각을 거느린 큰 절이었다. 조선 말인 고종 때도 영산전, 첨성각을 건립했고 적묵당, 유리전 등을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대향각을 중건했으며, 1919년에는 최승전을 건립했다. 신계사는 1920년대에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 나한전, 어실각이 배치됐다. 남쪽에 만세루가, 만세루 좌우에 향로전과 최승전 그리고 부속건물이 있었다.

1922년 12월에 화재로 용화전이 불타는 등 여러차례 화재가 있었다. 1945년경에는 반야보전, 나한전, 칠성각 등의 전각과 반야보전 앞에 석탑 1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신계사는 모두 소실됐으며 삼층석탑만이 남게 됐다.

신계사의 대웅전은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북한의 조선시대 말기 사찰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북한에서 문화재로 지정됐다. 금강산의 정양사 삼층탑, 장연사 삼층탑과 함께 ‘금강산의 세 옛탑’으로 불린다. 신계사는 근현대의 고승을 배출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조계종의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 탄허 스님 등을 길러낸 한암 스님 등이 신계사에서 배출한 스님들이다.

북한 금강산 문필봉 아래 복원한 신계사 그림 / 이태호 제공

북한 금강산 문필봉 아래 복원한 신계사 그림 / 이태호 제공

신계사 복원과 금강산국제그룹

신계사 복원은 1998년 3월 남측의 불교단체인 조국통일평화불교협회(평불협)와 북측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 금강산 국제그룹이 신계사복원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와 관련된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국제그룹은 박경윤 회장이 1988년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광사업을 논의하면서 시작됐다. 박경윤 회장은 새나라자동차(현 GM KOREA의 전신)를 세운 재일교포 사업가 박노정 회장의 부인이다. 1991년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평양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을 논의했고, 금강산 개발을 위해 금강산국제그룹을 설립하게 됐다고 한다.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의 2012년 4월 1일 인터뷰를 보면 이미 1988년부터 금강산 개발에 관심이 있었다. 1992년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전문회사에 용역을 맡겨 금강산 개발계획서와 타당성조사보고서를 1994년 완성하고 통일교 세계평화연합 박보희 회장과 김일성 주석을 면담한 뒤 개발계획을 비준받았다고 한다.

금강산 개발은 원산에서 휴전선까지 북한 동해안의 3분의 1을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공항, 철도, 항구 등 인프라 구축도 필요해 한 회사가 개발할 수는 없어 박경윤 회장은 여러 투자자를 유치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려고 했다. 특히 남측 기업의 투자를 기대했다. 금강산 개발은 초기에는 금강산을 개발하고 점차 원산으로 확대해 무비자 입국과 외환규제가 없는 금강산자유무역지구를 만드는 대규모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1998년 김정일 위원장은 금강산 개발사업을 현대그룹에 넘겨줬다. 박경윤 회장은 금강산 개발이 현대에 넘어간 경위에 대해 지금은 밝힐 수 없고 추후에 밝히겠다고 했다.

마지막 모습 그대로 복원

1998년 초까지만 해도 금강산 개발의 주체가 현대그룹으로 명확히 넘어가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북한당국은 신계사 복원을 금강산국제그룹에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복원을 위해 북한에서 중요 건축물의 대부분을 설계하는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복원설계도를 작성했다고 한다. 신계사복원불사 백서에서는 1998년 합의서를 체결했지만, 신계사 복원은 시행능력의 문제, 대표성의 문제 그리고 통일부의 협력사업 승인유보로 사업추진이 어렵게 됐다. 2000년 2월 아태는 금강산관광사업자인 현대아산에 신계사 복원을 요청했다. 현대아산은 복원을 위해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거쳐 조계종에 복원을 제안했다. 현대아산은 백두산건축연구원의 복원설계도 등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국내의 문화재 복원방식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조계종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북한 금강산 신계사터에 있는 3층석탑 / 이태호 제공

북한 금강산 신계사터에 있는 3층석탑 / 이태호 제공

현대의 제안을 받은 조계종은 10인 위원회(조계종 3인, 현대 3인, 전문가 4인)를 구성해 한차례 회의를 했다. 6월 7일 북한에서 합의서 초안을 현대를 통해 조계종에 전달했고, 초안 검토과정에서 복원방안을 구체화하게 됐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신계사 복원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2001년 11월 신계사 지표조사를 진행하면서 불사복원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남북은 복원방식에 대해 여러차례 협의를 진행했지만, 인식차가 커서 복원에 대한 합의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2003년 1월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과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복원의향합의서를 작성했다. 7월에는 조계종이 현대와 복원 관련 합의서를 작성했다. 2004년 1월 조계종과 현대가 복원실행합의서를 작성했다. 3월에는 조계종과 조불련이 실행합의서를 작성해 본격적인 복원 불사가 시작됐다. 복원 불사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간으로 하고, 우선 발굴조사를 통해 사찰의 복원방법을 정하고, 전통방식으로 복원을 추진했다. 신계사 복원을 위한 도감(감독)으로 제정 스님을 파견해 북한땅에 최초로 남측 스님이 상주했다.

복원은 남측에서는 조계종과 현대아산이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했고, 북측에서는 조불련,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문화보존지도국, 조선문화보존사, 평양건설대학이 결합해 사업을 추진했다. 조계종은 신계사 복원을 위해 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별도의 사무국을 두어 복원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신계사는 2007년 10월 13일 복원을 마무리하고 준공식을 진행했다.

1998년 촬영한 북한 금강산 문필봉 아래 신계사터

1998년 촬영한 북한 금강산 문필봉 아래 신계사터

신계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이었으며, 유서가 깊은 사찰이므로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복원에 대해 남측과 북측의 의견차가 커 복원원칙 합의에 어려움이 있었다.

남측은 ‘우리 손으로 지은 마지막 모습’, 즉 조선 말기의 사찰형태로 복원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남측에서는 복원기간을 6년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북측은 주춧돌 등이 지표상에 노출돼 있으므로 건물의 위치와 규모는 발굴조사 없이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발굴조사는 필요 없고 설계 및 복원기간에 2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여러차례의 협의를 거쳐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 확인을 전제로 설계를 하되, 설계는 남측이 하고 설계안 검토는 남북이 공동으로 한다. ▲복원 시기는 조선말의 모습으로 한다. ▲공사의 중요한 결정은 남북이 공동으로 하고, 발굴조사도 공동으로 하며 남북이 감독을 현장에 상주시킨다. ▲대부분의 공사는 남측이 하고, 북측은 안전과 공사에 필요한 보조 인력만 지원한다는 내용을 합의했다.

2019년 촬영한 복원된 신계사와 3층석탑 / 이태호 제공

2019년 촬영한 복원된 신계사와 3층석탑 / 이태호 제공

1990년대부터 남북문화유산교류가 이루어져 왔으나, 북한지역 문화재에 대한 발굴조사는 금강산 신계사 발굴조사가 최초였다. 2001년 11월 지표조사를 시작했으며 2003년 11월 1차 발굴조사 후 2007년까지 총 6차례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는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중기의 일부 건물배치를 확인하는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구가 교란돼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국내산 금강송으로 복원한 신계사

2003년 12월 대웅전 복원설계용역을 발주했다. 설계는 조선건축사사무소(소장 윤대길)가 맡고, 공사감리도 수행했다. 설계는 단계별로 발주했다. 2005년에는 만세루, 최승전, 산신각을 2006년에는 석축, 수숭전, 어실각, 어실각문, 대향각, 종각, 해우소 등의 복원설계를 발주했다.

문화재급 사찰 복원을 위해 목수는 인간문화재이거나 그에 준하는 목수이면서 불교신앙에 충실한 목수를 추천을 받아 선정하기로 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3인,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 1인, 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 추천 1인 등 5인이 추천됐다. 도목수의 실적, 완공한 건물의 실사 등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는 아니지만 사찰불사 경험이 많고, 불심이 깊은 최현규 목수를 선정했다.

최현규 대목수는 10대 후반부터 목수 일을 시작했다. 이정무 스님(경기 안성 석남사 회주)을 만나면서 불교 건축물 건립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2004년까지 60여채의 전각을 짓는 데 참여하고, 여주 신륵사 심검당 중창 등 30여건을 직접 감독했다. 최현규 대목수는 신계사가 다른 사찰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처마의 하중을 지탱해주는 대웅전의 공포(拱包)가 외 9포, 내 13포로 일반적인 공포(7포, 내 11포)보다 커서 많은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궁궐이나 사찰 건립에 사용되는 목재는 금강송을 최고로 친다. 금강송은 소나무의 품종을 말하기도 하지만 금강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말하기도 한다. 신계사에 사용된 목재는 대부분 국내산 금강송이고, 일부 큰 부재가 필요한 부분에는 러시아 목재가 사용되기도 했다.

복원공사는 목재를 여주공방에서 치목(목재재단)을 하고 육로로 운송해 현장에서 시공했다. 복원을 위한 대부분 자재는 남측의 자재를 사용했다. 인력도 보조인력을 제외하고는 남측인력이 시공했다. 신계사의 단청작업은 2006년 4월부터 시작했다. 신계사 단청작업은 구조물 복원과는 달리 남북이 협력해 진행했다. 단청작업도 문화재복원과 동일하게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 원칙을 적용했다. 남북한의 단청복원단장들은 문양선정, 세부적인 공정까지 토의와 합의를 통해 통일된 안을 만들어 실무에 반영했다.

단청작업에 북측의 기술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남북의 단청에 대한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북한의 단청 화원들은 전통기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청 복원은 1887년에 신계사를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는 <조선고적도보>를 참조했다. 자료가 없는 부분은 정양사, 표훈사, 석왕사 등의 사례를 참조했다. 단청작업에는 남측에서 김준웅(충남 무형문화재 단청장 제33호) 등 10여명이 참여했고, 북측은 조선문화사보존사 김수용 단청실장 등 20여명이 참여했다. 불상은 사진자료 등을 토대로 제작했으며 문화재청 조각기능자 문용대 선생이 담당했다. 불상은 목불과 청동불로 제작됐다. 복원공사는 2004년 4월 6일 착공해 2007년 10월 13일 낙성식을 했다. 복원공사에 약 3년 6개월이 걸렸다.

복원공사를 위한 재원은 모금과 남북협력기금을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약 80억원 정도가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낙성식 후 신계사 복원과 관련된 학술행사를 진행하고 신계사에서 법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피격된 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신계사에서의 일반 행사는 열리지 못하게 됐다.

불교 교류는 복합 교류로

신계사복원사업은 1990년대부터 이루어진 남북불교와 문화유산교류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북한지역에서 많은 건축공사가 진행됐지만 남북전문가가 수년간 협의를 하면서 협력해 프로젝트를 진행한 유일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의 문화유산 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발굴조사 등 문화유산 연구방법을 북한에 전수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도 됐다.

그러나 문화유산 복원 시 남측에서 자료조사, 실측, 설계, 재료를 확보, 치목과 시공을 담당하는 경우 비용이 비싸지고 기간도 오래 걸리는 등 여러 문제점이 있다. 북한이 복원을 위한 설계, 시공을 주도하는 경우 완전한 고증이 어렵고, 경험과 기술이 부족한 문제가 있으므로 남북이 협력해 적절한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향후 불교 교류는 우선 북한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위주로 시작하되,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의 범위를 넓히고, 지역도 북한의 지방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교 교류 시 단순한 종교적 교류가 아닌 의료, 교육, 영유아지원 등 다양한 분야가 복합된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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