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사 관심 끄고 살 생각 아니면 정치를 알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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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도로에서 시간은 늘 상습 과속을 저질렀다. 간신히 시간을 붙들었을 땐 이미 소집해제일이 임박해 있었다. 어느새 모든 선배가 회사를 나가고 후배만 3명인 ‘왕고’가 됐다. 그러자 슬슬 입사 시절이 떠올랐다. 이렇다 할 수리 매뉴얼이 없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선임자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야 했다. 말은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았고 선배는 금방 회사를 나갔다. 결국 무수한 야단과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때마다 ‘제대로 만든 인수인계서 하나만 있었더라면’ 하고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퇴사 1개월 전, 회사생활을 회고하듯 인수인계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퇴근 후 일과는 자발적 잔업으로 보냈다. 고치느라 애먹었던 고장 사례까지 샅샅이 뒤져 실업계 고교 1학년도 알아들을 수 있을 언어로 꼼꼼하게 써내려갔다. 겸사겸사 불량 통계도 만들어 연구실에 갖다 주었다. 후배들과는 회식에서 덕담을 주고받았고, 현장 냉장고엔 간식을 채워 넣고선 2년 10개월의 기능요원 생활을 알차게 마무리했다.

“이런 곳에 다신 오지 마라”

소집해제와 함께 정든 회사를 나오는 날,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얼마 안 가 집안 사정도 매우 나빠졌다. 빚이 너무 많아 편입 준비며 자격증 공부도 전부 내팽개치고 현실을 해결해야 했다.

2014년 7월, 급하게 잡은 다음 행선지는 한국GM이었다. 통근버스가 있고, 주5일 고정 업무이고, 시급도 나쁘지 않아 얼른 서류를 넣었다. 주말 아르바이트와 병행할 생각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일은 단순했다. 물류회사였는데 프레스기에 찍혀 나오는 자동차 문틀을 들어 거치대에 걸어주는 일이었다. 문제점 역시 단순했다. 프레스기 라인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물건 한 번 잘못 쥐면 그대로 라인을 멈춰야 했다. 중학생 때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보면서 낄낄댔던 내가 10년 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일도 일이었지만, 정말로 이가 갈렸던 것은 몇몇 정직원들의 모습 때문이다. 효성은 그나마 정직원과 하청 직원이 똑같은 일을 했다. GM은 아니었다. 우리가 두세시간 만에 한라인을 비우면, 정직원은 그제야 간이사무실에서 나와 프레스기 설정을 교체했다. 10여분의 작업을 마치면 도로 간이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뭐하는지 들여다보니 휴대폰으로 주식이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예 자는 사람도 있었다. TV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해달라 절규하는 하청직원들을 보았는데, 현실은 동일노동조차 안 시켜주는 셈이었다.

같은 조 사람도 문제였다. 입이 가벼웠는데 내 힘든 사정이나 이따금 농담처럼 던진 뒷담을 온통 떠벌리고 다녔다. 덕분에 같은 회사 사람들 얼굴 볼 낯이 없었다. 회사 안에서 늘 고개 숙이고 다녔다.

한달간 온갖 굴욕과 불합리를 버텨 간신히 월급을 받았다. 수면장애로 고생해가며 받은 봉급은 고작 200만원. 하도 적어 고개를 갸웃해보니 문득 이 회사의 특이한 출퇴근 시간이 떠올랐다. 주간은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야간은 오후 3시 30분부터 오전 1시 30분까지. 즉 야근수당을 받을 수 있는 구간이 3시간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시급 6000원에 퇴직금 대신 주는 수당을 합쳐 200만원이 겨우 나오는 셈이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회사 나가면 당장 빚에 떠밀려 익사할 판인 것을. 다시 한달이 지나갈 때쯤 옆 라인 직원 한 분이 회사를 나갔다. 원래 도면설계를 하던 분이었는데 기회가 와서 이직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들 축하하며 덕담을 주고받는 와중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직자에게 현장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이런 곳에 다신 오지 마라”라고 했다. GM은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9개월마다 노동자를 다른 사내하청으로 보내버렸다. 경력이고 뭐고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하는 이 일 역시 내가 쓰러져도 대체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언제 해고통보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외통수에 몰린 내 모습을 떠올리니 목구멍 안이 바삭해지는 느낌이었다.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느꼈다. 이대론 죽도 밥도 못 짓고 삶만 허비된 채 서른이 될 터, 대학교 전공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주말엔 운 좋게 조경 일당직을 나갈 수 있었다. 야간 일이 1시에 끝났기에 가능한 스케줄이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다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콘크리트로 쌓은 지반 위에 H빔을 세워야 했다. 이 일을 하며 처음으로 용접을 접했다. 세워놓은 H빔 균형이 흔들리지 않게 아주 조금 용접기를 갖다 대기만 하면 됐다. 불꽃 튈 때 납땜과 전혀 다른 그 느낌에 깜짝 놀랐고, ‘포터 아저씨’가 와서 마무리 용접하는 걸 어깨너머로 구경하며 흥미를 느꼈다.

용접에 대한 편견 버리고 흥미 느껴

‘용접’이란 단어는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나 역시 달리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 태양만큼 눈 따가운 빛이 아른대고 사방으로 벌건 불똥이 튀어대는 위험한 일 정도로 치부했다. 처음으로 용접면을 쓴 순간. 내 짧았던 인식이 얼마나 편견 덩어리였는지 깨달았다. 또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 어두운 세상, 지직대는 용접음만 남은 고립무원 속에서 치열하며 섬세한 손놀림이 팔자를 그리며 흐느적댄다. 천천히 진군하는 용융풀은 나긋하게 산책 나온 주홍 반딧불이 같다. 목적지에 도달한 반딧불이가 사그라지고, 지나왔던 길엔 용접인의 실력을 나타내는 흔적인 비드만이 남아 철판과 철판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내게 용접하는 걸 보여준 포터 아저씨는 전문 노가다꾼이었다. 주말마다 온갖 공구가 실린 트럭을 몰고 날 데리러 왔다. 상당한 입담꾼이라 일하러 갈 때, 쉬는 시간이나 밥 먹으러 가는 동안 옆에서 계속 말을 걸곤 했다. 이미 회사에서 직원과 말 섞었다가 크게 데였던지라 내 말은 하지 않고 적당한 대답만 꼬박꼬박하다가 4주쯤 같이 일하고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수다쟁이인 줄만 알았던 아저씨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었다. 내가 세월호 당시의 혼란, 선장을 욕하도록 유도하는 언론,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정부의 모습 속에서 대체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하자 아저씨는 명쾌한 대답을 던져주었다.

“정치를 몰라서 그래. 물론 정치를 몰라도 사는 데 아무 문제 없지. 모르면 대통령만 욕하면 되거든. 그런데 신문이랑 뉴스를 볼 때마다 답답하지. 정치를 모르니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잖아. 만사 관심 끄고 살 생각 아니면 정치를 알아야 해.”

그때 마음을 굳혔다. 더 늦기 전에 용접과 세상을 공부하기로.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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