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북한 어린이 보건·의료, 지속적이고 체계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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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 대용 콩우유 개발·공급… 병원 건립 등 지원범위 꾸준히 확장

어린이어깨동무는 대북지원단체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어린이 영양, 의료, 교육지원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콩우유(두유) 공장, 학용품 공장, 병원 등을 평양과 그 외 북한 여러 지역에 건립하고 2016년까지 운영지원을 했다. 국내에서는 어린이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통일교육을 하기도 한다.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공사 모습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공사 모습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어린이어깨동무는 어린이 운동 단체인 ‘공동육아’와 한겨레신문이 남북 어린이 교류를 위해 1996년 설립했다. 설립 초기, 북한의 식량난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 분유, 구충제 등 의약품, 밀가루 등의 인도적 지원을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따라 민간 교류가 확대됐으며, 어린이어깨동무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대표단은 북한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이 긴급구호 차원이 아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련 전문가들과 북한 어린이 영양개선을 위한 지원방안을 검토한 뒤 2000년 3월 북한 ‘어린이영양관리연구소’와 지원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식량난으로 모유 수유가 부족한 북한 영유아를 위해 대용 식품으로 콩우유를 개발·공급하기로 합의했다. 2001년 9월 콩우유 생산을 위한 제반 설비, 원료를 공급하고 운용기술을 전수했다. 콩우유 생산설비 지원과 기술전수는 어린이어깨동무의 본격적인 지원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준공 후 모습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준공 후 모습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건립사업

2000년대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사업은 평양 중심의 병원건립사업으로 추진됐다. 남측 단체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된 병원건립사업은 어린이어깨동무의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건립이었다. 어린이어깨동무가 북한에 어린이 영양과 관련된 치료와 연구를 위한 시설 건립을 제안했고, 2002년 2월 병원 건립에 합의했다.

병원 건립 시 남측은 설계와 의료장비 지원을 하고 북측은 건축을 맡기로 했다. 처음에는 ‘설사’ 관련 질병치료를 위한 병원을 건립하기로 했으나, 나중에 치과치료가 추가됐다.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2003년 4월 병원 건축자재도 남측에서 제공하기로 했다.

병원부지는 평양 동대원구역(‘구역’은 남한의 ‘구’에 해당) 새살림동(새살림거리)에 있었다. 동대원구역은 김일성광장 건너편 지역으로 주체사상탑이 있다. 골조공사 중 중단된 병원을 활용해 짓기로 했다. 기존 병원은 기초, 1층 기둥과 벽 일부 골조공사가 진행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7층 규모였으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남측에서 설계했다. 설계는 황영현 건축사(이가건축)가 담당했다.

평양의과대학 소아병동 입원실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의과대학 소아병동 입원실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연면적은 5450㎡(약 1649평)이며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설계했다. 지하층은 창고, 1층은 소아과진료실, 2층은 생화학 검사실, 3층은 연구실 및 교육자료실로 구성됐으며 병원과 콩우유공장을 연결하는 구조로 계획했다. 2층으로 휠체어나 침대의 이동을 위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며 정전을 고려해 별도의 경사로도 계획했다. 병원건축을 위해 어린이어깨동무는 모금을 진행했는데 삼성, LG, 한화 등 대기업에서도 참여했다.

2002년 11월부터 남측에서 건축자재 지원을 시작했고, 시공은 북한 ‘어린이 영양관리소’에서 담당했다. 북한은 남한 건축자재 사용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남한 기술자가 방북해 지도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사스(SARS) 때문에 지원이 일시 중단됐다가 2003년 11월 골조공사가 완료됐다. 2004년 마감공사 및 의료장비를 설치하고 2004년 6월 17일 병원 준공식을 열었다.

어린이어깨동무병원은 2003년 8월 준공된 류경정주영체육관에 이어 두 번째로 남측 민간에서 건축한 건물이고, 병원으로는 최초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건축기술에 대해 남측에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북한의 건축설계와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생각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평양어린이식료품공장 내에 있는 콩우유공장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어린이식료품공장 내에 있는 콩우유공장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의과대학 어린이어깨동무 소아병동

평양의과대학 어린이어깨동무 소아병동은 2004년 북한에서 적십자병원을 일부 개축해 건립해줄 것을 요청한 게 계기가 됐다. 그러나 어린이어깨동무는 모금으로 운영되는 민간단체이므로 추가로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어린이병원 준공 후 1년간 병원의 운영지원과 모니터링을 했다. 어린이병원 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하자 향후 보건의료협력사업 방향을 ‘산모와 영유아로 수혜 대상 확대’, ‘평양 이외 지역 진출’로 설정했다. 2005년 7월 북한은 어린이어깨동무에 어린이의료센터 설립을 제안했으며 2005년 11월 어린이어깨동무는 평양의대 내에 모자보건센터 건립을 제안했다.

평양의대 측은 산과는 평양산원이 담당하므로 평양의대 내 모자보건센터 건립은 불가능하다며 소아과병원 신축을 요청했다. 방문단은 어린이병원 신축이 아닌 소아과병원의 개보수는 검토가 가능하다고 답변하고 평양의대 내 소아과를 참관했다. 소아과병동은 기숙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보수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환경이 대단히 열악했다.

어린이어깨동무와 서울대병원 의료진으로 구성된 방문단은 소아과병동 신축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귀국 후 건축위원회와 소아병동 설립위원회(서울대 어린이병원 의료인 중심)를 구성했다. 2006년 3월 6일 어린이어깨동무, 서울대 어린이병원과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는 평양의대 소아병동 건립에 합의했다. 어린이어깨동무와 서울대 어린이병원이 당초 계획했던 의료협력 방향과 다르게 평양의대 소아병동 신축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병원단계별 연계치료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고 북한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의대병원은 북한의 중앙급 의료기관으로 하급단계의료기관(리 단위 병원, 군 단위 병원 등)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질환을 치료해야 하지만 시설이 열악해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평양의대의 소아과 의료인력 양성을 위해서도 소아병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평양의대는 평양의 중심인 중구역에 있다. 김일성광장에서 멀지 않고 평양지하철 봉화역과 당 창건 사적관(과거 노동당사로 쓰인 건물), 번화가인 창광거리에 인접해 있다. 평양의 중심가에 있어 소아병동이 신축되는 경우 상징성이 있는 위치다. 소아병동의 신축부지 선정과 관련해 북측과 이견이 있었다. 2005년 7월 소아과 참관 시 북측은 평양의대 정문과 떨어진 위치를 신축부지로 제시했고, 남측은 정문에서 멀어 응급환자이송에 효율성이 떨어지고, 햇빛도 잘 들지 않으므로 정문에서 인접한 공원에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북측은 남측이 제안한 위치에 대해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여러 번의 협의를 거쳐 정문에서 가까운 남측이 제안한 위치로 부지를 확정했다. 설계는 이상준 건축사(엘레멘타 건축사사무소)에서 2006년 3월 착수했다.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놀이방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놀이방 / 어린이어깨동무 제공

남북협력으로 건설된 소아병동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연면적 3967m²(약 1200평) 규모이며, 220병상 규모였다. 구조는 철골구조였다. 남북건설협력사업 중 철골구조로 건설된 것은 많지 않았으나 공기, 시공성, 구조적 안정성 등을 고려해 철골구조로 건립됐다. 2006년 6월 북측과 신축을 위한 역할부담에 합의했다. 북측은 부지, 건설인력, 모래 및 혼석, 장비임대, 변전소에서 소아병동까지의 전기공사 등을 맡기로 했으며, 남측은 신축을 위한 모든 건설자재와 전문인력을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북측에서는 소아병동에 집중치료실(중환자실) 설치를 요구했으나 어린이어깨동무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해 집중치료실 설치는 제외했다.

2006년 6월 14일 착공식을 했다. 7월 세부설계안을 협의했고, 8월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 건설공사 시 평양에서 일부 자재를 직접 생산하기도 했다. 벽돌을 남측이나 중국에서 반입하는 경우 운송비가 제작비보다 높아지는 문제가 있어 남측에서 벽돌틀과 시멘트를 제공하고 평양에서 직접 제작해 시공했다. 창틀은 한화에서 원자재를 제공하고 남측 기술자가 지도 감독형식으로 기술이전을 한 후 평양건재공장에서 제작해 시공하기로 했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은 일제강점기 원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므로 원산에 대한 애정이 있어 어린이어깨동무의 사업에 많은 지원을 했다고 한다. 건설자재 일부를 북한에서 생산해 공사비 절감이 가능했다. 북한에 기술이전 효과도 있었다.

건설시공은 처음에는 평양의대 직원들이 일부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기술이 부족하고 능률이 떨어져 공기가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해 평양시 건설사업소와 대외건설사업소에서 시공을 담당했다. 인도적 지원사업을 위한 건물공사 시 인건비를 남측에서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평양의대 소아병동 공사 인건비는 남측에서 별도로 지급하지 않았다.

공사 중 북한에서 병원에 추가 시설 설치와 지원을 요청했다. 북한은 병동 앞 포장을 위한 자재(아스팔트 피치), 시체처리구 설치, 조리시설 지원 등을 추가로 요청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협의를 통해 가능한 부분은 지원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병원 운영을 위해 수액 생산설비와 이동 진료차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북측과 협의해 추가로 지원하기도 했다.

2008년 9월 건물공사가 대부분 마무리됐다. 의료장비를 설치하고 작동교육을 실시했다. 2008년 10월 준공식이 진행됐다. 준공식에는 전세기로 어린이어깨동무 관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특히 남측 어린이들이 준공식에 참여한 것은 남북어린이교류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공사비, 의료장비 및 각종 비품 지원 금액은 약 50억원에 달했다. 남측에서 지원한 공사비를 40억원으로 추정하면 평당 공사비는 약 330만원으로 여타 병원공사와 비교하면 공사비가 적게 들어갔다. 벽돌, 창호 등을 현지에서 생산한 것과 준공 전 고압전류를 인입해 공사를 원활히 한 것이 공사비 절감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된다.

평양의대 소아병동은 외벽이 폴리카보네이트로 마감돼 독특한 외관을 형성하고 장소적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건물의 형태가 직사각형이므로 독특한 외벽재료 사용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이질감을 주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건물에 중정(아트리움)을 두어 채광, 소음 등에 유리하도록 계획했다. 북측은 에너지 사정이 좋지 않으므로 채광은 조명과 난방을 고려하면 계획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평양의대 소아병동은 장소성, 조형성, 남북협력방식 등을 고려했을 때 북측에 지원한 건물 중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평양의대 소아병동을 건축하면서 개성, 남포, 원산 등 직할시와 도청이 있는 도시의 어린이병원 11곳을 현대화하는 일을 구상했다. 2007년 겨울 어린이어깨동무는 남포시 소아병원을 둘러봤다. 남포시 소아병원은 와우도 구역 용수동에 있었으며 외래병동과 입원병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입원병동이 열악하므로 4층으로 신축하기로 합의하고 2008년 4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일어났고,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공사는 중단됐다.

지속성·연계성이 필요한 북한지원사업

어린이어깨동무의 북한지원사업은 일회성이나 이벤트성이 아닌 사업의 지속성과 연계성이 특징이다. 1998년 북한에 지원사업을 시작한 이후 평양어린이어깨동무병원, 콩우유공장, 유치원 및 학교개선공사 등 지원사업을 하면서 사업이 단순히 시설 건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준공 후 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지원을 지속했다. 지원범위도 꾸준히 확장했다.

콩우유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콩우유 원료를 계속 공급했다. 원산 등 지방에 콩우유공장을 건설하고 영유아 시설이나 학교지원을 연계하기도 했다. 보건의료와 관련해서는 병원 운영을 위한 약품, 의료도구, 소모품과 장비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의료인의 교류와 북한 의사에 대한 교육도 시행했다.

남북관계는 남북만이 아니라 국제정세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관계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남북의 지정학적인 위치, 남한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남북교류와 협력은 불가피하다. 남북교류와 협력이 재개되는 경우 개별적·분산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의료보건 협력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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