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블랙홀을 맨눈으로 보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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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뭔지 잘 몰라도 곧잘 들어봤으리라. 블랙홀이 극적으로 등장한 소설을 꼽으라면 다나카 요시키의 장편연작 <은하영웅전설>이 뇌리를 스친다. 양 웬리의 자유행성동맹 우주함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은하제국 우주함대에 맞서 블랙홀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친다. 그러고는 맹렬히 추격해오는 적을 피해 블랙홀로 달아난다. 자살행위를 자초하는 듯했던 양 웬리의 함선들은 돌연 양옆으로 갈라서며 뒤따라온 제국함선들을 맹렬하게 포격한다. 제국함선들은 엉겁결에 끝을 모르는 중력우물로 추락한다. SF에서 이보다 더 흔한 블랙홀의 용도는 지름길이다. 수백, 수천광년의 까마득한 거리를 단숨에 건너뛰거나 심지어 평행우주로 점프하게 해준다.

2017년 실제로 촬영된 M87 초질량 블랙홀 / 블랙홀 관측 글로벌 프로젝트 ‘EHT’ 홈페이지 갈무리

2017년 실제로 촬영된 M87 초질량 블랙홀 / 블랙홀 관측 글로벌 프로젝트 ‘EHT’ 홈페이지 갈무리

블랙홀은 단지 상상 문학 속 천체가 아니다. 천문학자·이론물리학자들의 진지한 연구대상이다. 다만 빛까지 집어삼키는데다 아득히 멀리 있어 관측이 어렵다는 게 애로사항이다. 하나 과학이 머릿속 상상을 따라잡는 시대 아닌가.

2017년 실로 야심찬 프로젝트(EHT)가 전 세계 천문학계의 협력 아래 추진된다. 바로 블랙홀을 과학기술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치 높은 해상도로 촬영해 그 생김새를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이다. 그간 학자들은 블랙홀의 사적 영역인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는 그 어둠의 세계가 강한 중력에 꺾인 주위 빛들에 둘러싸여 찬란한 링처럼 보이리라 예견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광환(光環)은 이런 예측에 따른 시뮬레이션이다. 이 링은 블랙홀의 윤곽을 드러내주기에 ‘블랙홀의 그림자’라 불린다.

블랙홀은 정말 그런 모습일까? 2017년 남극과 하와이 그리고 스페인에 이르는 총 6개 대륙의 전파망원경 8대가 하나처럼 맞물려 동시 관측을 했고, 데이터의 취합·보정·판독에만 2년이 걸렸다. 지구만 한 천체망원경을 조립해 한쪽 반구가 블랙홀을 바라보게 한 셈이다. 한 천문학자는 큰 거울을 산산조각 내 지구 곳곳에 뿌려놓고, 그것들에 비친 상(像)을 다시 한데 모으는 거라 설명했다.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는 760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했고, 한국천문연구원과 국내대학들에서도 10명이 힘을 보탰다(정치경제 분야에서도 지구촌 단위의 순수한 협력이 가능하면 얼마나 좋을까).

관측대상은 5480만광년 너머의 타원은하 M87 속 초질량 블랙홀이었다. 어느 은하든 중심에 가공할 크기와 질량의 거대블랙홀이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M87 초질량 블랙홀은 우리은하의 것보다 1000배 크고 태양질량의 65억 배나 된다. 최종 판독결과 이 블랙홀은 중력으로 휘어진 지름 400억㎞의 빛의 고리(그림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 있는 블랙홀의 실제 지름은 약 160억㎞로 추정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인간은 논리 못지않게 직관을 중시한다. 일반인에게는 블랙홀에 관한 토론보다 해상도 높은 증명사진 한장이 더 와닿는다. 지적 생명이 살 만한 외계행성에 관한 무수한 논쟁보다 외계인과 만나 악수 한 번 하는 편이 낫듯이(만약 외계인에게 악수할 손이 달려 있다면). 이제 블랙홀도 관측해 연구하는 시대다. 그러니 거대블랙홀 간 충돌을 직접 사진에 담아내는 날이 조만간 올지 모르겠다. 정치경제는 몰라도 적어도 과학에서만큼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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