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역사에서 숨겨졌던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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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라는 논픽션과 동명의 영화는 1960년대 미소 우주개발 경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활약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인류 역사의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돼 왔지만, 정작 우주개발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한 이들 중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은 수십년이 지나서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의장은 유인 우주 비행선 ‘뉴 셰퍼드’의 첫 탑승객 중 한명으로, 1960년대 우주비행사 자격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주비행을 거부당했던 13명의 여성 우주비행사 중 한명인 월리 펑크를 택하기도 했다.

박영숙의 작품 ‘36인의 포트레이트’

박영숙의 작품 ‘36인의 포트레이트’

<한국여성사진사 1> 전시장 입구 전경 / 필자 제공

<한국여성사진사 1> 전시장 입구 전경 / 필자 제공

<히든 피겨스>와 월리 펑크가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것은 아직도 인류 역사의 페이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대다수가 남성인 현실을 반영한다. 물론 한국의 현실 또한 다르지 않은데, 예를 들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박사가 쓴 박사학위 논문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2004)은 노동운동 역사에서 숨겨져 온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재조명한다. 전 박사는 “한국 노동운동 민주화가 1970년대 섬유·의류산업 부문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술 분야는 어떨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8월 22일까지 개최 중인 <한국여성사진사 1: 1980년대 여성사진운동> 전시 관람을 권하고 싶다. 1980년대에 활동한 여성 사진가 10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19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여성 사진가들의 활동을 자료로 소개하는데, 그 수가 36명에 이른다. 전시 서문을 쓴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이경민 대표는 해방 이후 한국사진사에 대한 통사적 연구는 1978년에 출간된 <한국현대미술사: 사진>이 유일한데, 여기에 여성 사진가들이 누락됐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흔히 한국 현대사진의 기점으로 언급되는 1988년의 <사진, 새 시좌> 전시 대신 그 기점을 1980년대 초반으로 앞당길 수 있는 전시로 1983년 <여류사진가전>을 언급한다. 1983년 당시 전시의 참여작가인 6인(김민숙·류기성·박영숙·송영숙·이은주·임향자)의 작업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영숙 작가의 ‘36인의 포트레이트’(1981)는 연극인 박정자, 성악가 박노경, 의상디자이너 트로아 조, 시인 신달자, 미술가 윤석남 등을 찍은 작품이다. ‘변관식의 어느 하루’(1975)는 포토에세이 형식의 작업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확대한 송영숙 작가의 작업도 흥미롭다. 전 박사가 “유교적 질서 속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개인적 지적 자율을 부인당했으며, ‘남성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분야에 여성이 파고드는 것은 주제넘고 혐오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라고 위의 논문에서 지적했듯,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업적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져 왔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초창기 현대사진사에서 숨겨져 있던 여성들의 역할을 되새겨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정필주 문화예술기획자·예문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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