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더 녹았음 발목 짜를 뻔했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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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버는 대기업이니 하청도 대우가 괜찮겠지.’ 그 순진한 생각은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박살 났다.

고향의 풍경은 풀보다 쇠가 더 많았다. 마산항 바다 맞은 바라기엔 언제나 커다란 배와 드높은 철골 크레인이 눌러앉아 있었고, 해안대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면 수출자유지역이 보였다. 퍼런 지붕과 빛바랜 외벽의 공장들을 한참 지나면, 창원과 마산의 경계인 봉암교가 나타났다. 그 너머엔 마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장의 숲이 도사렸다. ‘언젠간 나도 여기서 일하면서, 이곳에서 쭉 살아가다가, 이 어딘가에서 삶을 마감하겠지.’ 조숙했던 꼬마의 단상은 스무 살이 되자 현실로 다가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전문대 입학 후 첫 여름방학, 생애 첫 공장 알바를 마산 공단의 노키아에서 했다. 돌이켜보면 참 괜찮은 회사였다. 깨끗한 내부 환경, 적당히 시원한 실내온도, 썩 괜찮은 회삿밥, 친절한 종업원 누나들까지. 하지만 좋은 점보다는 불만을 더 많이 느꼈다. 방진복은 입기 귀찮았고, 주야 교대근무는 힘겨운 데다가 라인 작업은 지겹기 짝이 없었다. 나무젓가락처럼 철썩 붙어 있는 최저시급과 잔업 특근도 부당하게 느껴졌다.

노키아가 얼마나 괜찮은 직장이었는지는 다음 공장 알바를 겪고서야 깨달았다. 1학년 2학기 끝나고 겨울방학, 주야근무가 마냥 싫어 낮에 일하는 회사 대충 골랐다가 낭패를 봤다. 종업원 수 4명의 도장업체였다. 하얀 콘크리트 벽은 페인트가 벗겨져 회색과 반반을 이루고 있었고, 실금도 드문드문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위는 거미줄이요, 아래는 먼지투성이였다. 놀랍게도 중년여성 한 분이 일하고 있었고, 나름의 사무실도 존재했으며, 파키스탄인 부부가 흉가 같은 방 안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내 업무는 체스 말처럼 생긴 자동차 부품을 쉴 새 없이 기계에 올리고 내리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다 가까스로 맞이한 점심시간, 회사 옆 식당에서 먹었던 밥은 훗날 훈련소에서 받아먹은 배식보다 맛이 없었다. 가까스로 두달을 채우고 나왔다.

2010년 초엔 한창 고졸 채용이 유행이었다. 우리 학교 역시 예외는 없었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T/O가 자그마치 20개가 떨어졌다. 복학생들은 너도나도 졸업을 포기하고 대기업 품에 안겼다. 오죽하면 LG를 못 가고 삼성 갔다며 신경질을 냈을까. 미필자인 나는 대기업 문 앞에서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그다음 2학기엔 현장실습이 있었다. 방학 동안 두어달 하는 공장 알바와는 다르게, 한학기 전체를 일하며 일지에 기록을 남겨야 했다. 겨울방학까지 근무에 성공하면 나머지 과목은 전부 A? 처리. 학비 대며 생활하기도 빠듯한 형편에 자격증 딴답시고 학점 농사에 대실패했는지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군대 안 간 동기들 넷이 모여 머리 맞대고 회사를 찾아다녔다. 그중 한 친구가 업체 하나를 물어왔다. 효성 4공장 협력사. “여 가도 괘안나?” 동기들이 의견을 물어왔다. 방학 때마다 공장 알바를 다녔던 내 대답은 의사결정에 매우 중요한 바로미터였다.

효성 사내하청 정도면 나름 괜찮으리라 판단했다. 마침 당시 대통령께서 자주 운운하던 말씀이 낙수효과 아니던가. ‘돈 많이 버는 대기업이니 하청도 대우가 괜찮겠지.’ 그 순진한 생각은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박살 났다. 사장은 환히 웃는 낯으로 최저임금도 안 되는 시급 4000원을 제시했다. 우리는 작업복만 챙겨 입은 채 첫날 바로 현장에 떠밀렸다. 사장은 선임자 한명을 소개해주었다.

선임자가 가르쳐준 일은 섭씨 400도짜리 온장고에서 원형 통을 반출해 2층 계단을 올라가 ‘주형기’라 불리는 기계의 통 안에 화학물질을 붓는 일이었다. 몇 번은 그럭저럭 조심하면서 일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통이 워낙 무거웠는지라 결국 붓다가 실수하고 말았다. 발에다가 그 뜨거운 수지를 쏟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놀랍게도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당황해 얼른 발을 빼긴 했지만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산재 시 대응 방법을 교육받은 적이 없으니,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수지를 쏟았다고 고함치자, 선임자가 헐레벌떡 뛰어왔고, 그 선임자가 전화를 걸자 사장이 또 씨근벌떡 뛰어왔다. 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마를 짚은 채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듯한 표정. 사장은 나를 차에 태워 동네 의원으로 데려갔다.

새빨갛게 짓눌린 화상을 본 의사는 파상풍 주사와 항생제를 맞히고 처방전을 끊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증이 별로 없어 그러려니 했다. 고통은 밤이 돼서야 찾아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며 가려움, 살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 결국 잠 한숨도 못 잔 채 출근했다. 용케 정시퇴근을 한 후, 자주 가는 신경외과에 갔다. 의사는 내 발목 꼬락서닐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1㎝ 더 녹았음 발목 짜를 뻔했구마. 우짜다가 이리 다쳤노?” 그토록 심한 화상인데 어째서 통증이 없었냐 물었더니 의사 왈. 화상이 워낙 심해 신경 말단까지 녹았으니 애초에 아픔을 못 느낀단다.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의사는 입원을 종용했다. 최소 전치 5주니 산재처리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땐 이 부상이 마냥 내 탓처럼 느껴졌다. 중도에 실습을 그만두어 생길 학점 손해가 무서웠고, 입원했다 돌아왔을 때 직장 사람들의 싸늘한 표정도 두려웠다.

결국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다. 3주차까진 하루 평균 잠을 4번 정도 깼다. 그땐 신체능력이 한창일 시기라 눈 좀 따갑고 몽롱할지언정 몸이 무겁진 않았다. 정말 무거운 건 마음이었다. 새벽녘에 깨고 나면 정리 못 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로 진로와 엮인 생각 뭉치였다. 전공과 무관한 현재, 피할 수 없는 병역 문제, 편입과 취업의 가르맛길까지. 무엇 하나 선택 못 한 채 다섯달의 현장실습 기간이 지났다.

마침내 졸업장을 받아들었을 땐 뿌듯함보다 불안함이 더 컸다. 인생이라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 대학 졸업이란 층까지 도달했는데, 눈앞에 군대라는 층마저 지나면 절벽만 남아 있을 듯한 느낌. 마침 ‘지잡대’라는 단어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다. 인터넷에서 지잡대 졸업생들은 이제껏 배운 공부가 무용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으로 묘사되곤 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한창 갤럭시S2가 보급되던 시기에 고작 스위치로 스피커를 껐다 켰다 하는 회로 만드는 지식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졸업생끼리 “자주자주 연락하자”라는 공허한 약속을 주고받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바짝 말라붙은 목 안으로 끈적대는 마른침을 흘려 넘겼다.

천현우는 2011년에 전문대 전자과를 졸업해 중소기업을 전전했다. 청춘 2막이라 생각했던 시기에 찾아온 가난으로 본래 전공과 무관한 용접공이 됐다. 낮에는 쇠를 녹여 제품을 완성하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완성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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