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팀 단위 의료서비스 ‘클리블랜드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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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두 아이의 어머니 코니 컬프는 남편이 쏜 산탄총에 맞아 얼굴 중앙부가 함몰되는 사고를 겪었다. 코는 완전히 부서지고 볼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시력도 거의 잃었다. 30회에 걸친 수술로 얼굴을 복원했지만, 자력으로는 냄새를 맡거나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약 4년이 지난 2008년 컬프는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안나 캐스퍼의 안면조직을 기증받을 수 있게 됐다. 얼굴의 80%가량을 이식하는 수술은 의료진이 컬프의 얼굴에 기증받은 안면을 덮고 혈관을 연결하는 순서로 이뤄졌다. 마침내 정상적으로 혈액이 공급되는 것을 확인한 순간 무려 22시간에 이르는 대수술이 끝났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했다고 기록된 수술이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클리블랜드 클리닉 본관의 전경 / 클리블랜드 클리닉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클리블랜드 클리닉 본관의 전경 / 클리블랜드 클리닉

미국 최초의 안면 전체 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 병원의 이름은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이다. 이곳은 메이요 클리닉, 존스홉킨스 병원,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과 더불어 미국 4대 병원으로 꼽힌다. 2020년 기준 약 4600명의 의사와 과학자들이 일하고 있고 의료진을 돕는 지원인력은 간호사 1만4000명을 포함, 무려 6만8000명에 달한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이미 독특한 직장문화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문화는 설립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곳을 설립한 조지 크릴과 프랭크 번츠, 윌리엄 로워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이들은 민간에서의 의료방식과 달리 오직 부상병들이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팀을 구축해 환자 회복에 집중하던 군대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당시 내과 전문의로 활동하던 존 필립을 영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클리블랜드 클리닉을 설립했다.

참전 군의관들이 설립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설립 초기부터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세계 최초의 그룹 프랙티스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운영 방식을 채택했다. 그룹 프랙티스는 팀 단위 의료서비스를 뜻한다. 일반적인 병원이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등 각각의 전문과 별로 구분해 진료하는 데 반해 그룹 프랙티스 병원은 의사들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개별 통합 진료팀을 구성해 운영한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2008년 다시 한 번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한다. 그룹 프랙티스가 더욱 기능적으로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당시 조직 구분 기본 단위인 진료과를 없애고 이를 27개의 임상, 연구, 교육, 지원 인스티튜트로 전환한 것이다.

인스티튜트 제도는 의사와 과학자, 기초학문을 전공한 전문가들이 상호 협력을 통해 환자 치료 및 질병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그 밖의 다양한 지원업무는 해당 부서에서 전담하는 제도이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각 인스티튜트는 각각의 질병에 맞는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기술과 서비스를 갖춘 독립적이고 유기적인 팀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국내에서도 의사들 간의 협력 사례는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암센터와 심혈관 질환 전문센터 같은 곳이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몇몇 진료과의 협력을 넘어 다양한 진료과 전문의를 포함해 각종 지원업무 인력까지 하나가 되어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서비스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병원은 극단적인 환자 중심의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점이 눈에 띈다. 가령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가 종합병원에 방문했다고 치면, 환자는 내분비내과에서 당뇨병에 대한 치료를 받고 합병증의 종류에 따라 관련 진료과를 몇차례 더 방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는 환자가 한곳에서 필요한 진료를 모두 받을 수 있다. 앞서 코니 컬프의 대형 수술도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인스티튜트 제도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 사례이자 오늘날 이들을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한곳에서 여러 진료과 치료받아

컬프의 수술은 당시 피부·성형 인스티튜트와 두경부 인스티튜트가 협력한 결과물이다. 또한 수술에 참여한 인원은 이들을 포함해 신경과, 정신과, 치과, 안과, 마취과, 감염질환과의 전문의들로 구성됐고 그밖에 의료윤리, 사회복지, 간호, 약국, 보안 등 여러 분야의 인스티튜트가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오랫동안 이들은 다양한 이식법을 연구하고 개발했으며, 면역반응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주말마다 해부용 시체로 40회에 달하는 모의실험을 진행하고 명확한 매뉴얼을 기획했다. 나아가 심리학자는 예상 환자의 수술 적합성을 평가하는 업무를, 사회복지사는 향후 가족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 미리 고민하고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인스티튜트 제도가 과연 취지처럼 제대로 기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없지는 않았다. 의사 개개인의 능력이 팀 아래에서 발휘되지 못할 수도 있고,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기우에 불과했다. 각종 수치도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인스티튜트 제도가 성공적이라는 점을 보이고 있다. ‘US 뉴스앤월드 리포트’에 따르면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2020년 26년 연속 심장 수술 부문 1위 기록을 이어갔고, 상위 10위 이내에 든 13곳의 전문 병원 가운데 한곳으로 선정됐다.

이 모든 활동의 정점에는 늘 ‘극단적인 환자 중심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환자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문화를 발전시켜 최선의 진료결과를 창출해내고, 그 결과 전 세계에서 환자를 유치해 매출을 끌어올린다. 높은 매출을 통해 다시 최고의 시설과 연구과제, 인적자원에 투자하니 최적의 의료서비스와 전문가를 확보하는 지속 가능한 경영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운영 방침은 브랜드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크게 차별화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차별화를 위해선 경쟁 병원에서 아직 내세우지 않았거나 내세울 수 없는 독특하고 차별적인 제안, 동시에 소비자의 행동을 쉽게 유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방안이 필요한데 ‘극단적인 환자 중심’이란 구호 자체는 어느 병원에서나 쉽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에 860만명에 달하는 외래환자가 이곳을 찾아 연간 약 1000억달러(약 11조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려주는 것만 봐도 이들의 구호는 구호에만 그치지 않고 무형의 가치와 유형의 만족감을 동시에 제공했음이 입증된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인스티튜트 제도를 통해 새로운 의료서비스의 범주를 스스로 창출했다. 그래서 다른 병원과의 경쟁 또한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이곳을 찾는 환자는 개별 진료과목의 전문성을 보지 않고 오직 클리블랜드 클리닉이라는 하나의 의료서비스를 경험하러 온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어쩌면 이들이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의 ‘철학’ 때문이 아닐까.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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