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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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마를 둘러싼 두가지 결말

픽션에 있어 악역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하는 게 불필요할 정도다. 이제는 ‘매력적인 악인’이란 얼핏 반어적인 수식조차 당연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아예 악인을 주역으로 내세운 작품도 굉장히 흔해졌다.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라면 모름지기 살인자를 불가해한 존재 그 이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경찰을 우롱하듯 증거품을 보내며 카리스마를 과시하는가 하면, 살인의 당위를 설명하고 정신이상의 기저를 파고들며 악의 근원과 이유를 구체화한다. 반드시 처단당할 게 분명했던 악인이 어쩐지 요즘엔 질긴 생명력을 지닌 채 시리즈의 얼굴처럼 기억되는 이유다.

「네 번째 원숭이」(J.D. 바커 지음) 비채 제공

「네 번째 원숭이」(J.D. 바커 지음) 비채 제공

<네 번째 원숭이>(J. D. 바커)의 연쇄살인범, 일명 ‘네 마리 원숭이 킬러(4MK)’ 역시도 역사적 악역으로 남을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4MK라는 살인범의 별칭은 일본 도쇼구 신사의 원숭이 부조상에서 기인한다. 각각 귀와 눈과 입을 가린 3마리 원숭이는 “악을 듣지 말고, 보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4MK는 희생자를 납치해 차례로 그의 귀와 안구와 혀를 배송한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시체에는 “악을 행하지 말라”고 쓰인 쪽지가 쥐어져 있는데, 이는 네 번째 원숭이상의 의미다. 그 메시지 그대로 살인범은 스스로 집행자를 자처하며 잔혹한 납치 살인과 함께 희생자가 연루된 범죄 증거를 제시해왔다. 문제는 그 방식이 지극히 잔인할 뿐 아니라 그가 대상으로 삼은 이는 범죄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란 데 있다.

4MK는 지난 5년 동안 무려 7명을 같은 패턴으로 살인했다. 형사 샘 포터를 비롯한 4MK 전담반은 그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네 번째 원숭이>가 4MK의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버스에 치여 사망한 남자는 그동안 경찰이 받았던 21개 상자와 동일한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누군가의 귀가 담겨 있었던 것. 여덟 번째 희생자는 귀를 잃은 채 죽어가고 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생경한 도입부 이후에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요동친다. 무엇보다 죽은 살인범이 품고 있던 일기가 수사 중인 사건과 병치되며 두가지 이야기가 함께 전개되는데,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 모두 각자 굉장한 속도감을 자랑한다. 일기는 살인범이 자신의 유년기를 기술한 것으로 여기에 희생자나 살인범의 단서가 있을 것이란 암시 때문에 포터 형사는 독자와 함께 이를 차례대로 읽어간다. 당연히 살인범의 마음속을 탐사하리라 생각했던 일기는 단지 그의 속내를 헤집는 것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사건이 돼 계속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4MK의 부모는 서슴없이 살인과 고문을 하며 심지어 이런 이상행동을 어린 아들에게 ‘교육’하기까지 한다. 자연히 일기 안에서도 살인으로 말미암은 위기가 차츰 의외의 파국을 향한다.

일기가 또 다른 범죄의 ‘경험담’으로 자리하는 가운데 4MK의 죽음이 의도된 자살이란 의문과 그는 정말 4MK가 맞을까 싶은 의심이 여러차례 반전에 반전을 더한다. 그래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형사들이 감춘 어두운 비밀과 살인자의 의도대로 설계된 거대한 그림은 더욱 묵직한 충격을 준다. 시종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며 두가지 결말로 질주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실로 놀랍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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