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체르노빌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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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전문지 ‘사이언스’가 최근 체르노빌 원전에서 새로운 핵반응 조짐이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콘크리트로 덮어씌운 폐쇄된 원자로 내부 우라늄 덩어리에서 핵분열 반응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이라고?” 소리가 저절로 나올 법하다. 체르노빌 사고는 1986년 4월 26일에 일어났으니까. 원자력의 이용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 비롯된 셈이니, 그 역사는 80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대미문의 힘에 대해 전부 안다고 착각한다.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 포스터 / HBO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 포스터 / HBO

에미상 10개 부문을 석권한 5부작 미드 <체르노빌>(왓챠 서비스 중)은 실제 체르노빌 사고 당사자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촘촘한 고증을 통해 1986년 당시를 복원해 보여준다. 러시아 정부는 “가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러시아를 비방한다”며 격분했다. 드라마임에도 그 사실성 때문에 다큐멘터리라 헛나갈 정도니 재현 수준을 러시아 정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이 드라마는 체르노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보고서를 보듯 정교하게 구성돼 있다. 동시에 픽션의 장점을 살려 방대한 내용은 적절히 축약하고, 가상 인물을 설정해 요약하는 역할을 맡겨 밸런스를 유지한다.

드라마 예고편에는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한 당국이 인근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순간의 방송이 등장한다. 실제 1986년 당시 방송음성을 그대로 삽입했다. 그걸 알고 들으면 오싹해진다. 그때 임시 대피한 이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82세 할머니에게 군인들이 강제 퇴거를 종용하자 그 할머니는 “내가 몇살인지 아느냐? 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제2차 세계대전 다 겪으면서도 떠나지 않은 집”이라며 버틴다. 침통한 표정을 짓던 군인은 할머니가 젖을 짜던 소를 즉각 살처분한다. 이를 본 할머니는 체념한 채 집을 떠난다. 그 참혹한 역사를 견뎌낸 이조차 겪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공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체르노빌의 과거와 현재를 요약해서 한 번에 보려면 2020년 신작 <체르노빌: 지옥의 묵시록>(EBS D-box 서비스 중)을 추천한다. 30여년이 지난 체르노빌 주변은 겉으론 생태계가 오히려 복원된 것처럼 보일 만큼 야생동물 천국이다. 오랜 혼란과 내전으로 궁핍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다크 투어리즘 관광객을 유치해 체르노빌 관리비용을 충당할 정도다. 이곳은 스릴을 즐기는 ‘스토커’라 불리는 비공식 모험가들의 도전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사고 당시 강제 소개된 후 영영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의 기억,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피폭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현실 또한 상세히 소개된다.

체르노빌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했기에 후쿠시마라는 재앙이 인류에게 돌아왔고, 인접한 우리에게도 오염수 방류문제가 닥쳐왔다. 그 거대한 힘을 인간은 아직 제대로 알지도, 온전히 통제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음을 1986년의 사건은 여전히 증거하고 있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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