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북한경수로건설-아쉽게 중단된 최대 규모의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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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핵은 관계가 깊다.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시 많은 재일교포가 희생됐으며, 1951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자 맥아더는 핵폭격을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핵폭격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이 월남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경수로 부지로 결정된 함경남도 금호지구 전경 / 석임생 제공

경수로 부지로 결정된 함경남도 금호지구 전경 / 석임생 제공

1958년에는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됐고, 1972년에는 배치된 핵무기가 732개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핵과 관련한 역사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핵위협을 받고 있었고, 1958년부터는 직접적인 핵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북핵위기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89년 프랑스의 상업위성(SPOT)이 찍은 영변 핵시설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다. 북한과 남한, 미국은 핵 관련 협의를 진행했다. 1991년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그해 12월 ‘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남한에 배치됐던 핵무기를 모두 철수했다. 북한은 1992년 4월 1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16개 핵시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6월에는 IAEA에서 핵사찰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점까지 북한 핵문제는 큰 문제 없이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3년 2월 IAEA는 북한이 신고를 누락했다며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강력 반발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준전시 상태를 선언했다.

미국은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 핵독점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NPT 탈퇴 전날인 6월 11일 북한과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IAEA 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포기를 요구함으로써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1994년 6월 13일 북한은 IAEA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엔의 제재를 전쟁선포로 받아들인다’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북미회담이 파국으로 치닫던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2차례 면담했다. 김일성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하고 선제 핵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면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NPT 탈퇴 선언을 철회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국의 북미 직접대화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월 21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제네바합의(Geneva Agreed Framework)가 체결됐다. 이 합의의 주요 내용은 북한은 NPT 탈퇴 선언을 철회하고 핵시설을 동결하며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매년 50만t의 중유를 제공하고 1000㎿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는 것이었다.

경수로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생활단지 배치도 / 김정신 단국대 명예교수 제공

경수로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생활단지 배치도 / 김정신 단국대 명예교수 제공

제네바 합의 후 한국정부는 1994년 말까지 경수로 추진을 위한 각종 법령을 정비하고 1995년 1월 경수로지원기획단을 설치했다. 1995년 3월 한·미·일 3국은 경수로사업추진을 위한 국제기구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 설립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경수로사업을 KEDO라는 국제기구로 추진하기로 한 것은 북한이 남북 간 직접대화를 기피했고, 남북 간 의견대립 시 완충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에 지원할 경수로 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북미 간 전문가회의가 1994년 11월 30일 시작됐다. 경수로는 한국표준형 원자로로 결정됐다. KEDO와 북한 간 경수로공급협정은 1995년 12월 체결됐다. 공급협정문은 18조로 4개의 부속합의서가 포함됐으며, KEDO와 북한의 업무분담에 대한 내용을 명기했다.

북한의 업무는 부지 제공, 경수로 사업이행을 위한 정보 문서 제공, 경수로 부지로 통행 보장, 골재, 채석장 제공, 시운전에 참여할 인원 보장 등이었으며, 그 외 건설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KEDO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사업방식은 KEDO가 경수로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고 준공 후 북한에 인계하며 북한은 경수로사업비를 준공 후 3년 거치 17년 무이자 상환하는 방식(거치기간 포함 20년 상환)이었다.

총사업비는 40억달러선에서 산정됐고, 1998년 환율변동에 따라 46억달러로 조정됐다. 사업비는 각국이 분담해 조달하고 KEDO에 차관형태로 제공하는 것으로 했으며, 개략적으로 한국 70%, 일본 22%, 미국 외 기타 회원국 8%로 정했다. 단 한국과 일본은 중유공급에 대해서는 분담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한국은 분담금 마련을 위해 전기료 할증부과방식, 에너지세제 개편에 따른 세수증가분 활용 등을 추진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국채를 통해 조달했다.

경수로 건설공사

경수로 부지는 함경남도 금호지구(북위 40도, 동경 125.4도)에 있다. 함흥에서 80㎞, 신포시에서 165㎞ 떨어져 있다. 경수로사업이 시작되면서 신포시에서 독립해 금호지구가 됐다. KEDO는 1997년 북한으로부터 부지를 인수하고 세부지질조사, 기상, 환경, 해양, 생태조사 등을 실시하고 예비 안전성분석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해 북한당국에서 건설허가를 받아 2001년 9월 본격적인 경수로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경수로 건설 노동자들을 위한 생활단지 시설물 / 석임생 제공

경수로 건설 노동자들을 위한 생활단지 시설물 / 석임생 제공

부지 조성 규모는 경수로가 들어설 부지 기준으로 550만㎡(166만평)였다. 북한은 부지 내에 있는 수백채의 가옥을 철거했다. 부지정지 착수 후 가끔 포탄, 유골 등이 발견됐으며, 그때마다 북측에 통보해 처리했다.

초기 부지조성공사와 생활단지공사현장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공사를 위해 우선 난방과 욕실시설을 갖춘 숙소용 컨테이너(11동)와 사무실용 컨테이너(12동)를 설치했다.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컨테이너(77동)도 늘어났다.

1996년 3월 20일 KEDO는 경수로사업을 수행할 주체로 한전을 주계약자로 지정했다. 계약 내용은 공사금액 41억8200만달러, 공사기간 116개월, 1호기 준공일은 2008년 11월 30일, 2호기 준공은 2009년 9월 30일이었다.

2000년 2월 3일 주계약이 발효되면서 공사에 착수했다. 2001년 9월에는 북한이 건설허가를 발급하고 2001년 9월 3일 본관기초굴착공사를 착수했다. 2002년 8월 3일 1호기 원자로의 최초 콘크리트 타설을 진행하고 골조공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2차 북핵문제로 공사가 중단되는 2003년 11월 30일까지 성공적으로 공사가 수행됐다.

대부분 대북사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력과 물자의 운송이다. 초기 경수로현장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에서 북경으로 비행기로 이동해 북경에 있는 북한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후 고려항공으로 평양에 도착한 후 평양에서 강상리까지 기차로 이동했다. 기차로 이동시간이 20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어 서울에서 현장 도착까지 3~4일이 걸리기도 했다.

1997년 7월 12일 최초로 평양에서 경수로 부지 근처의 선덕공항까지 소형항공기를 이용해 이동했다. 2002년에는 양양에서 선덕공항까지 남북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했다.

경수로공사 사진 / 석임생 제공

경수로공사 사진 / 석임생 제공

물자운송은 화물선이 이용됐다. 6000t급 선박이 매월 20일경 운항을 했다. 경수로사업 종료 시까지 약 138회 운항됐다. KEDO 전용부두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양화항을 이용했다. KEDO 전용부두가 완공되고 북한통행검사소가 설치된 2003년부터는 전용부두를 이용했다.

경수로공사 사업중단 전까지 북한은 38건의 도급공사에 참여했다. 고급기술이 필요 없는 시멘트벽돌 제작, 울타리 설치, 석축 쌓기, 도로 보수공사, 잔디식재 등이었다. 인력공급은 ‘노무, 물자, 시설 및 서비스 사용을 위한 일반원칙과 지임에 관한 양해각서’에 조건이 명시돼 있다. 보통근로자는 월 110달러, 숙련공은 공급자와 구매자 간 협의에 의해 정하도록 돼 있다. 작업조건은 일 8시간 근무(중식시간 제외), 주 6일 근무(주 48시간), 필요 시 일요일과 공휴일 근무가 가능하며, 12개월 이상 근무자는 유급휴가를 주는 조건이었다.

경수로공사는 초기부터 북측 인력투입을 고려했다. 북측 인력을 활용 시 북측 인력의 기술향상, 공사비 절감, 남북인력의 교류확대 등이 장점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으므로 남북한 인력을 약 3:7로 투입하는 것으로 계획해 북측과도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이 인건비 인상을 요구해 본공사 시작 후 북측인력을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경수로공사의 의의와 시사점

경수로사업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불거지면서 2003년 12월 공정률 34.5%에서 공사가 중단됐다. 사업의 공식 종료는 2006년 12월 12일이다. 경수로사업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국제정치적 변수에 의해 중도에 종료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경수로공사는 북한지역에 진행된 남북협력사업 중 최대 규모의 사업이고, 대규모 남측인력이 장기간, 대규모로 체류한 최초의 사업으로 이후 진행된 금강산관광사업, 개성공업지구개발사업에 중요한 선례가 됐다.

남북관계는 2010년 이후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지만 남북교류가 재개되는 경우 북한의 인프라 개선, 경제특구개발 등을 위한 대규모 건설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수로건설사업 등 북한지역에서 건설사업을 수행한 경험은 향후 북한개발사업 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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