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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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청산되지 못한‘80년 광주’의 트라우마

제목 아들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Son)

제작연도 2020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90분

장르 드라마

감독 이정국

출연 안성기, 윤유선, 박근형, 김희찬, 이세은, 이승호

개봉 2021년 5월 12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제작 영화사 혼

공동제작 위즈씨엔아이

제작지원 광주광역시, (재)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엣나인필름

㈜엣나인필름

아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성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수를 한다고? 이거 이미 있던 설정 아닌가. 영화관에 들어서며 생각했던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이 코너의 전신, ‘터치스크린’에서 리뷰했던 강풀 만화 원작의 <26년>이다. 서울 연희동의 ‘그분’을 단죄하러 나선 경찰관, 국가대표 선수, 재벌 등. 1980년 광주에서 인생의 나머지가 뒤틀려 버린 사람들의 복수극이다. 실제 영화가 개봉한 것은 1980년의 26년 후인 2006년이 아닌 2012년이었다. 26년의 콘셉트에 맞게 영화는 2006년께로 설정한 가상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41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그런데 올해로 41년 째다. 1980년에 태어난 사람이 이제 40대에 접어들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기엔 아들이 그때 죽었다면 간극이 너무 크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까 궁금했다.

영화는 주인공인 오채근(안성기 분)이 산속에서 목을 매려 하면서 시작한다. 목에 밧줄을 건 순간, 낯선 새 한마리가 눈에 띈다. 앵무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새라 산속에서 발견될 일 없는 새다. 결국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자살계획은 중단된다. 서울 단칸방에 사는 그는 대리기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가 대리기사를 하는 것은 한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유튜브에 나와 “1980년에 공산화될 뻔했던 대한민국을 우리가 지켰다”고 주장하는 투스타 출신 장군 박기준(박근형 분). 영화 설정으론 5공화국 때 꽤 잘나갔던 인물이고, 지금은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열심히 들고 있다. 또 한명, 오채근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동네 밥집에서 일하는 처자 진희(윤유선 분)다. 자식 정도의 연배차다. 5·18 때 광주 도청에 남아 최후까지 저항했던 그의 아버지는 항쟁 후 끌려가 고문당하면서 정신이상이 왔고, 그후 수십년을 병동에서 보냈다.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다가 혼기를 놓치게 된 것. 암 선고를 받아 시한부인 아버지를 위해 진희는 오채근에게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부탁한다. 병원에서 나온 아버지는 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오채근을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 숨겨놓은 권총을 겨누며 오채근에게 자기 딸과의 관계를 되묻는다. 그러다가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그 권총으로 박기준과 연희동의 ‘그분’에게 복수를 계획하게 된다.

시간이 흘렀으니 오채근의 아들은 물론 5·18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아들이 어떻게 오채근이 가지고 있던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트리거가 되는지는 핵심복선이므로 앞으로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자.

9년 전 <26년>이 개봉했을 때 기자는 리뷰에서 인물과 장소라는 캐스팅에서 ‘1980년 광주’가 겪어야 했던 지난한 인정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건과 인물을 지역적 틀,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게토였던 전라도라는 지역적 틀에 가두지 않기 위해서 영화가 취했던 전략이 눈에 밟혔다. 당시 리뷰에서 쓴 것처럼 26년의 여주인공인 심미진이 ‘그 사람’을 저격하기 위해 택한 장소는 영화상에서는 서울 연희동 인근이었지만, 실제로 촬영된 곳은 광주광역시 동구의 학생과학관이었다. 영화 개봉 후 5·18 헬기 기총소사의 증거인 탄흔이 밝혀진 구 전남도청 앞의 전일빌딩도 장소로 캐스팅됐다. 5·18은 여전히 광주라는 ‘게토’에 갇혀 있었다.

여전히 ‘게토’에 갇혀 있는 5·18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어떨까. 진희가 일하는 ‘한강식당’은 영화상 설정은 실제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 인근의 서민동네 식당(실제 장소 캐스팅은 여전히 광주에 있는 식당)이다. 진희의 아버지는 경기도 남양주에 살았는데, 진희의 엄마인 광주 출신의 여자를 만나러 갔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는 설정이다. 시일이 한참 지난 후에도 계속 광주 인근을 맴도는 오채근은 실제 호남과 관련 없는 인물로 설정을 하고 있다. ‘광주의 확장’을 목표로 하다 보니 무리한 설정이 꽤 보인다. 연기에선 나무랄 것 없는 국민배우 안성기에게 오채근 역을 맡긴 것도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역을 맡은 강동원처럼 전략적인 선택이겠지만, 차라리 얼굴이 조금 덜 알려진 연기파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면 극장 문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은 적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왜 권총을 책 상자에 숨겼을까

경향 자료

경향 자료


영화에서 주인공 오채근이 권총을 감춰두는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책 상자 속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다시 총을 숨겨가는 것은 시바스 리갈 양주병 종이상자였고. 영화에 등장하는 책들이 눈에 밟혔다.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일 텐데, 제일 먼저 눈에 밟히는 것은 오채근이 상담하러 간 정신과 의사의 책장에 꽂혀 있는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다. 세상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으니 희망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일까. 두 번째로 눈에 띈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와 <상실의 시대>였다. 영화 내용에 대한 은유나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에 대한 암시라기보다 제목에서 부채감이나 상실감 등을 차용하는 것 같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찬가지이고. 또 한권 눈에 띄는 책이 있는데, 그건 바로 흔히 ‘해전사’로 줄여 부르던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어찌하다 보니 뉴라이트들로부터 소위 586에게 ‘시대착오적 좌파정서’를 안긴 대표작으로 지목되는 책이다. 이 책을 노출한 이유는 뭘까. 시대의 복권?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이다. 오채근 집 아들 방에 붙어 있는 그림이다. 극중 오채근의 말로 프루스트의 책으로부터 뽑아냈다는 테제는 ‘고통은 그것을 철저히 경험함으로 치유된다’다. 극중 액세서리로 등장하는 책들은 어쩌면 감독 자신이 직시하기를 꺼리던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 내지는 호의호식에 대한 죄의식을 투영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직시하면 고통은 치유될까. 감독은, 그리고 필자를 포함해 ‘1980년 광주’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모두는 죽기 전에 언젠가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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