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현대미술가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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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인 이불의 개인전 <이불-시작>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16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쉽게 접해왔던 ‘개인전’들과는 꽤 다른 맥락의 전시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개인전이 작가가 직접 제작한, 혹은 목표로 하는 표현이 완성된 창작 결과물로서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이불-시작> 전시는 이불의 작품 활동 초기인 1987년부터 10여년 동안의 퍼포먼스 활동에 관한 자료들을 메인으로 하는 일종의 ‘아카이브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사진 홍철기/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사진 홍철기/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퍼포먼스나 행위예술 작업은 전시가 가능한 결과물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때문에 퍼포먼스 준비 및 실행 과정을 기록한 소리·사진·영상이나 창작노트 등의 자료들은 필연적으로 회화·조각과 같은 일반적인 형태의 작품과 유사한, 때로는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이브 전시는 작가의 작품세계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돕는 것은 물론, 그 당시의 시대상이나 참여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 관계 등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돕기에 미술사적·사회학적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실제로 1988년부터 1996년 사이 진행됐던 33회에 걸친 이불의 퍼포먼스 중 12점의 영상을 좌우 벽의 전면에 걸쳐 상영하고 있는 2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금 20세기 말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당시 남성 중심 사회의 부조리적 권위 구조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상징하는 영상 속 조각 코스튬 혹은 움직이는 ‘소프트 조각’들은 작가가 2019년 들어 홍콩 아트바젤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10m 길이의 대형 조각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과는 아주 다르다. 서로 다른 작가의 작업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그럼에도 전시장에서는 21세기 이후의 국제적 스타작가 이불에 관한 정보나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시는 철저하게 첫 개인전에서부터 1990년대 말까지 이불의 초기작들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지금’의 이불 작업세계,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관점이 뿌리내리고 있는 시대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충돌의 시작 자체가 이번 전시의 의도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런 충돌이야말로 작가가 끊임없이 자기 극복과 변신을 해왔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작가 이불을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충돌을 꾀한 서울시립미술관은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의 활동과 평가가 많아진 작가 이불에 대한 보다 입체적이며 통시적 관점의 해석과 평가를 독자적으로 이끌어낼 기회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국내 작가들의 국제 예술계 무대 진출을 가로막아온 고질적 문제인 고유의 작가론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필주 문화예술기획자·예문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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