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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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정상회담 이후 남측에서 설치 제의

이산가족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반영한다. 이산가족 관련 남북 간 협의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 초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평화통일 구상’을 밝히며 ‘선의의 체제경쟁’을 제안했고,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에 이산가족찾기를 제안했다. 북한은 8월 14일 제안을 수락했으나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지 못하고 적십자 본회담은 1973년 7차를 끝으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본회담 외에 적십자 실무회담은 지속됐다. 1975년 실무회담에서 남한은 북한 판문점에 남북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할 것을 최초로 제안했으나 북측은 호응이 없었다.

2002년 9월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모습 / 현대아산 제공

2002년 9월 제15차 이산가족 상봉 모습 / 현대아산 제공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85년이었다. 1984년 서울 풍납동지역 수해가 발생한 후 북한이 수재민에게 물자를 보내겠다고 적십자사에 제안해 물꼬가 트였다. 남한적십자사는 수해물자를 받겠다고 답변하고 추가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을 재개해 1984년 11월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합의했다.

2000년 이전 이산가족 상봉은 단 한차례

남북은 방문단 규모, 방문지(남한-고향, 북한-평양과 서울) 등에 이견이 있었으나 여러 번의 협의를 통해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예술단의 공연이 열렸다. 후속으로 열린 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자유 왕래, 이산가족의 재결합, 남북 적십자공동위원회설치,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등에 대해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고 새로운 통일외교정책의 기본방향을 담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 선언 후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 관련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 1989년 5월 북한적십자사에서 회담을 수락해 9월부터 7차례에 걸쳐 실무회담이 열렸으나 역시 이산가족 상봉은 합의하지 못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1990년부터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됐으며, 이산가족 상봉 관련 협의도 진행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말 레임덕에 들어간 것, 남쪽 대북강경파들의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반발 등으로 무산됐고, 관련 회담은 1998년까지 열리지 못했다.

2000년 이전에도 남북이산가족 상봉 혹은 고향방문이 여러 번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단 한 차례 있었을 뿐, 모두 2000년 이후 이루어졌다. 특히 직접 대면 상봉 22번 중 15번이 200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이 가장 중요한 공약이었다.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6·15 정상회담이 계기가 됐다.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2000년 한 해 동안 이산가족방문단을 2차례 교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협의를 위해 금강산에서 6월 27일부터 열린 1차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에서 남한은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를 제의했다. 남한은 이산가족면회소를 별도로 건설하는 것이 아닌 남측의 자유의집이나 북측의 통일각을 활용해 매월 4회, 회당 100명씩 상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남북은 이산가족면회소의 설치·운영에 기본적으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추후 협의하기로 했다. 남한이 이산가족면회소 설치를 제안한 것은 이산가족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상봉 제도화와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4)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2000년 9월 열린 제1차 적십자 본회담에서 남측은 면회소를 판문점 각 측 지역에 각각 설치해 매주 100명씩 만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북측은 면회소를 금강산에 설치할 것과 운영과 관련된 문제는 12월에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편리한 판문점이 아닌 금강산 지역에 건물을 신축하자고 제안한 것은 판문점이 유엔이 관리하는 지역인 점을 꺼렸고, 금강산이 남한 주민의 방문을 허용한 유일한 북한지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2년 9월에 열린 4차 적십자회담에서 면회소를 △우선 금강산지역에 설치 △경의선 철도·도로가 연결되면 추가로 서부지역에 설치하는 문제 협의 및 확정 △금강산지역에 설치하는 면회소는 남북이 공동 건설하되 자재·장비는 남측이, 공사인력은 북측이 제공 △금강산면회소 완공 후 면회 정례화 등을 합의했다.

상봉 제도화와 상시적 만남 장소 확보

건설을 위한 실무접촉은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월까지 3차례 열렸다. 북한은 면회소 건설장소를 온정리 조포마을로 할 것과 면회소를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로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남한은 건물규모는 증축이 가능하므로 우선 적정규모로 할 것을 주장했다. 남북은 이견을 해소하지 못했으나 규모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되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 실무자들이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8월, 남과 북은 금강산에서 건설실무자(추진단)회의를 열었으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건설실무자회의가 난항을 겪자 2003년 11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 면회소문제를 논의했다. 남북은 ‘전담건설·전담관리’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공감했고 면회소 장소, 규모, 완공 후 시설·관리 운영문제 등에 대해도 의견접근을 이루었다.

금강산면회소 장소는 고성군 온정리 조포마을 앞 구역, 규모는 6000평으로 결정하고 ‘금강산면회소 건설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합의서에는 남한이 건설과 관리·운영을 전담하고, 북한은 금강산 현지에서 건설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신변안전과 편의를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2003년 11월 건설에 합의해 남측은 면회소 건설을 위해 준비를 진행했다. 면회소 공사를 계기로 조달청은 처음으로 북한에서 건축되는 건축물의 설계 및 공사과정에 참여했다. 공사는 남북 근로자 간 접촉이 증대되는 등 남북 간 교류와 협력 증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모습 / 현대아산 제공

면회소는 5만㎡(1만5000평)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12층 규모의 면회소동과 지상 3층 규모의 면회사무소 2동 및 경비실로 계획됐다. 면회소동 1·2층엔 600명을 수용하는 행사장과 회의실, 편의시설 등이 들어서며 3·4층에 호텔구조 객실 78실, 5∼12층에 콘도구조 객실 128실 등 총 206실의 객실이 마련됐다. 면회소는 최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게 건설됐다.

건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로 건설이 가능했으나, 공사 기간 단축과 북측 근로자의 건설시공능력 등을 고려해 철골구조로 계획됐다. 금강산의 전력 사정을 고려해 건물 내에 전력생산과 난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일종의 CES·Community Energy System)을 구축했고, 용수공급을 위한 심정도 설치했다.

2005년 착공, 공사기간 연장 끝에 완공

이산가족면회소 착공식은 2005년 8월 31일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장재언 북한적십자회 중앙위원장, 남과 북 이산가족 550명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강산 온정리 조포마을 앞 면회소 부지에서 남북 공동행사로 진행됐다. 2007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됐다. 정부는 이산가족면회소 건립을 위해 남북협력기금에서 대한적십자사에 550억원을 지원했다.

면회소 공사의 시공사는 현대건설과 현대아산(주)컨소시엄이 담당했다. 건설공사의 감독과 감리는 조달청 공무원이 금강산에 상주하면서 수행했다. 공사에는 북한인력이 참여했다. 투입된 건설인력은 대부분 외부에서 차출된 돌격대였으며, 이들의 숙식을 위한 컨테이너를 설치해 공사를 진행했다.

순탄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이산가족면회소 공사는 여러 난관이 있었다. 북한은 2005년 말 발생한 미 재무부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계좌 동결에 대한 대응으로 2006년 7월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면회소 공사를 중단시켰다. 공사는 중단 후 7개월이 지난 2007년 3월에 재개됐으나 2년이었던 공사 기간 연장이 불가피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양측은 면회소 완공 시 이산가족 상시 상봉을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적십자회담에서는 상봉 행사 정례화도 합의했다. 그러나 이산가족면회소는 2008년 7월 11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당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는 공사가 완료돼 7월 12일부터 감리에 의한 준공검사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8월 중순 열릴 예정이었던 준공식은 취소됐고, 2008년 하반기로 진행하기로 했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열리지 못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 후 이산가족면회소는 정상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2009년 9월, 2010년 10~11월, 2014년 2월, 2015년 10월, 2018년 8월 등 5차례 이산가족 상봉에 사용됐을 뿐 12년간 방치됐다. 방치된 이산가족면회소의 모습은 남북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산가족문제는 인도주의적 문제다. 정치적인 이벤트가 아닌 순수한 가족의 만남으로서, 이산가족 상봉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져 이산가족면회소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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