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불교 및 문화유산 교류의 거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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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남북 불교협력과 문화유산 교류 두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먼저 남북 불교협력 측면에서 영통사 복원사업은 신계사 복원사업과 더불어 불교계의 대표적인 협력 사업이었다. 사찰 복원 후 매년 법회와 행사를 개최했고, 2010년 천안함 사태로 5·24 북한 투자제한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2015년까지 교류를 지속했다.

개성 영통사 복원 후 전경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개성 영통사 복원 후 전경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문화유산 교류 측면에서 영통사 복원사업은 대표적인 사찰 복원사업으로 의의가 있다.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계기로 국내에서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일본 연구자 중심인 아시아학회에서 개최한 1990년 3월의 학술대회였다. 이후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2015년 이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확대돼 약 35개 사업이 진행됐다.

개성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남북 불교협력과 문화유산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 시 영통사가 불교 및 문화유산 교류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통사 지원사업의 시작

영통사는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에 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11세인 1065년 영통사에서 출가했고, 입적 후에는 이곳에 탑비가 건립됐다. 영통사는 왕과 왕비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왕실의 원찰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도 개성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개성 영통사 복원 전 모습 / 한국학 중앙연구원

개성 영통사 복원 전 모습 / 한국학 중앙연구원

영통사는 1995~1996년 북한 대홍수 당시 절터를 덮고 있던 토사가 쓸려가며 흔적이 드러났다. 영통사 발굴조사는 김정일 위원장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전국적인 사업이 됐다. 연 3만명이 동원됐으며 일본 다이쇼대학도 참여했다.

북한은 영통사 발굴 작업과 더불어 복원을 추진했다. 1999년 11월 북한 중앙통신은 영통사의 복원설계를 끝냈다고 발표했다. 복원설계에 따르면 영통사는 약 4만㎡의 부지에 고려시대 사원 건축술을 구현한 수십동의 건물을 짓는 것으로 기본 사찰지구, 동북 무덤지구, 서북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눠 복원되며 사찰의 총 건축 면적은 약 2800㎡에 달했다.

국내 불교계는 의천이 개성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창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영통사를 천태종 발원지라고 주장했다. 의천이 1065년 출가해 이 사찰에서 35년간 승려생활을 하며 천태종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98년 5월 영통사 복원에 한국 천태종의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 요청은 재일동포 최준씨와 조총련 부의장 김수식씨를 통해 천태종 총무원장인 전운덕 스님에게 전달됐다. 천태종은 구두로 지원을 약속하고 현지답사를 제안했다. 북측은 천태종의 현지답사 제안을 승인했으며, 2000년 11월 천태종 스님, 신도 대표, 학자 등 13명이 방북해 현장조사와 복원을 협의했다.

개성 영통사의 중심 건물인 보광원에 모셔진 부처상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개성 영통사의 중심 건물인 보광원에 모셔진 부처상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북측은 영통사 복원을 추진하던 중 자재 부족 등으로 복원을 중단한 상태였다. 천태종과 북측은 영통사 복원지원 여부와 성지순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지원 방식(천태종은 현물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북측은 현금지원을 요구)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에 실패했다. 영통사 복원지원 관련 협의는 중국 베이징에서 2003년 4월 재개됐다. 양측은 2003년 8월 5일 베이징에서 한국 천태종이 북측에 기와 40만장을 지원한다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다만 복원공사 과정에서 몇가지 아쉬운 점들이 보였다. 먼저 영통사가 문화재급 사찰임에도 콘크리트로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복원은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진행됐으며, 공정은 기둥과 벽체, 골조공사를 진행했다. 이것은 문화재 복원 소재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당연히 문화재를 전통 재료와 전통 방식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1세기 전만 해도 문화재 복원에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긍정적 의견이 많았다. 북한 또한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문화재를 콘크리트로 복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남북 문화유산 교류 시 이러한 인식차 극복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영통사 복원에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복원 시 고증의 정확성 여부다. 영통사 전각의 양식, 규모, 단청 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복원설계가 단기간에 이루어졌으므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복원 지원사업의 과정

베이징 합의에 따라 기와의 최초 지원은 2003년 10월 27일로 결정됐지만 운송 방법을 두고 난항을 겪었다. 북측은 기와를 해로로 인천에서 남포로 운송한 후 다시 육로로 개성으로 운송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천태종은 해상 운송 후 다시 육상 운송을 하면 여러 번 옮겨 실으면서 기와가 훼손될 수 있고, 비용과 시간도 많이 소요되므로 육로를 통한 운송을 주장했다.

영통사 5층 석탑/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영통사 5층 석탑/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합의는 쉽지 않았으나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육로 운송을 지시하며 육로를 통해 2003년 10월 27일 최초로 기와 10만장을 지원했다. 연이어 11월 2차, 12월 3차 지원을 통해 총 26만장의 기와가 지원됐다. 그러나 4차 지원 준비 중 북측에서 기와를 영통사 복원 현장이 아닌 개성공단에 하역하고 돌아가라고 통지했고, 천태종이 동의하지 않아 4차 지원은 중단됐다.

이후 현장까지 운송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2004년 2월 다시 지원을 시작했다. 2004년 3월 26일 영통사 29개 전각을 위한 46만장의 기와 지원이 완료됐다. 천태종은 2004년 6월까지 단청 재료도 추가 지원했다. 단청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공사이므로 북측은 건축과 미술 전공 대학생 600명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2004년 4월 11일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천태종은 성금을 모금해 의료, 생필품 등을 지원하기도 하며 남북 간 신뢰를 높여나갔다. 이는 불교계가 단순히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이유로 사찰 복원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닌 평화적인 남북경협과 민간 차원에서의 인도적 교류라는 근본적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영통사 건축자재 전달식 모습 /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영통사 건축자재 전달식 모습 /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단청 지원 후 복원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자 천태종은 건축 마감재 및 중장비 지원을 결정했다. 이는 향후 남측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위한 도로공사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장판, 창틀, 유리, 타일, 변기 등 건축자재와 더불어 불교예불 도구 및 집기 등 사찰운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지원됐다.

불상은 북측에서 제작했는데 동불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용천역 폭발사고의 영향으로 석고로 제작했다. 개금(불상에 금을 덧씌우는 것)을 위한 재료는 천태종에서 지원했다. 복원공사지원은 2003년 10월 1차 지원부터 2005년 3월까지 총 16차에 걸쳐 시행됐다. 영통사 복원이 마무리돼 가던 2004년 11월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대각국사 열반대제’를 봉행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 영통사 29개 전각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됐다. 1997년 유적조사를 시작한 후 8년 만이었다. 지원에 들어간 비용은 자재비, 인건비 및 운송비를 포함해 약 150억원에 달했는데 비용은 대부분 모금을 통해 마련했다고 한다. 영통사 낙성식은 2005년 10월 31일 열렸다. 낙성식에는 천태종을 중심으로 남측에서 300여명이, 북측에서는 조선불교도연맹 등 복원공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낙성식 후에는 학술대회가 개회됐다.

영통사 복원공사 준공(낙성) 전 남북불교 교류는 부정기적이고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준공 후부터는 매년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규모와 질도 달라졌다. 2007년 5월 29일 성지순례 시범사업이 시행됐으며, 성지순례는 총 8회에 걸쳐 6000여명이 참여했다. 성지순례 외에도 매년 영통사에서 부처님 오신 날, 대각국사 열반대제 등 불교 행사를 남북공동으로 열었다. 이 행사는 2009년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2015년까지 지속됐다.

성과와 전망

변상욱 건축사

변상욱 건축사

영통사 복원사업은 남북이 협력해 문화유산을 복원한 최초의 사례이며 민간협력사업에서 대규모 물품을 육로를 통해 지원하는 계기가 된 사업이기도 하다.

영통사 복원사업은 북측이 발굴, 복원설계 및 복원공사를 주도했고 남측은 건축자재, 장비 등을 지원했다. 향후 남북 문화재 공동 복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북측이 주도하고 남측이 물자를 지원하는 방식이 주가 될 가능성이 커보여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의 또 다른 중요한 의의는 건물 준공 후에도 지속적인 남북교류를 했다는 점이다. 2009년 이후 남북관계의 어려움으로 남북경협 및 인도적 지원이 대부분 중단된 상태에서 2015년까지도 교류의 명맥을 유지했다, 남북 불교 교류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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