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가, 나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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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파멸로 내모는 아이

SNS에 누군가는 아이돌 사진을, 누군가는 강아지나 고양이 사진을 올릴 때 다른 누군가는 한결같이 자기 아이 사진을 올린다. 이상할 건 없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아이가 자신의 ‘최애’일 테니까. 하지만 SNS에서 보이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순간만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저 혼자 어엿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므로 육아라는 이름의 지난한 과정을 부모는 오로지 사랑과 헌신으로 감내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부모도 결국 인간인지라 아무리 예쁜 내 자식이라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순간만 있을 리 없다. 산후 우울증이나 육아 스트레스 같은 말로 대충 뭉뚱그리기엔 각자의 사정은 다 다르고, 차마 밖에 알리기 어려운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아기를 불가해한 존재로 바라본 공포는 이런 보편적인 공감에 기인한다.

「나의 아가, 나의 악마」의 표지 / 알에이치코리아 제공

「나의 아가, 나의 악마」의 표지 / 알에이치코리아 제공

호러 장르는 종종 아이를 공포의 주체로 삼아 가족이라는 작고도 큰 세계의 몰락과 고통을 그려내곤 한다. 특별한 지점은 아기라는 순수한 존재 안에 서린 ‘악’을 발견해나가는 과정과 그 모든 것이 바깥 세계에서는 알아챌 수도 없고 밖으로 알리기에도 곤란하다는 데 있다. <나의 아가, 나의 악마>의 일곱 살 해나 역시 어린아이 특유의 영악함과 천진무구함을 한데 엮은 기이한 존재로, 무조건 포용할 수도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단단한 굴레 안에서 점차 자신의 가족을 파멸로 내몬다.

우선 해나는 청각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크론병을 앓는 엄마 수제트와 단둘이 보내는 낮 동안에만 공격적으로 돌변하고, 아빠 알렉스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딸을 연기한다. 수제트의 말마따나 해나가 교묘하게 편 가르기를 종용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이들 부부를 조종하고 있다고 느낄 법하다. 그리고 이는 점증하는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구심과 위협을 홀로 맞닥뜨리는 수제트의 고립감이 보편적인 공포로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나는 단지 수제트를 괴롭히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엄마가 자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자신을 오래전 화형당한 마녀 마리앤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지만, “여자는 이런저런 것들을 보기 시작하고, 남자는 무시하고, 여자는 미쳐가는” 그런 전형적인 이야기에 머물진 않는다. 일방적인 피학자인 수제트만이 아니라 가해자인 어린 해나에게까지 번갈아 시선을 할애하며 결코 합리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나에게는 늘 엄마를 괴롭힐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은 종종 또래보다 훨씬 영특하고도 폭력적으로 돌출되는 탓에 외려 이 점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긴 한다. 이를테면 아빠 몰래 인터넷에서 시체 사진을 출력하고, 일곱 살 아이의 언어로는 보기 힘든 ‘세포’나 ‘지문’ 등을 언급하면서까지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하려 드는 것이 그러하다. 덕분에 갈피를 잡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작은 소시오패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미숙한 듯 뒤틀린 아이의 천진한 악행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늘하다. 무엇보다 어린 딸이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걸 알면서도 이를 ‘치료’하고자 애쓰는 부모의 악전고투, 그 딜레마야말로 지극한 공포라 할 만하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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