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금강산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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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명산을 직접 밟아보다

금강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하는 노래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른 노래였던 것 같다. 내게 금강산은 수많은 글, 노래, 그림 등의 예술작품에나 나오는 상상 속의 산 같은 것이다. 그래서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을 위해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금강호를 보며 비현실적인 감흥을 느꼈다.

해금강 설경 / 사진작가 이정수

해금강 설경 / 사진작가 이정수

금강산관광 논의는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관광사업에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정 회장은 냉전체제가 해체되면 북한과의 사업이 현대그룹 도약의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외 정세 때문에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 회장의 1992년 대통령선거 낙선이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1998년 정권교체 시까지 중단됐다.

정권이 바뀐 후 정 회장은 대북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1998년 6월 22일 현대그룹과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금강산관광사업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금강산관광사업 계약체결에 앞서 6월 16일 정 회장은 소 떼 500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 장면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금강산관광은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분계선 통과가 유엔사 관할이기 때문이다. 또 금강산에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도 없었으므로 배에서 숙식이 가능한 크루즈를 이용해 관광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크루즈 4척을 말레이시아의 스타크루즈에서 임대했다. 크루즈의 이름은 금강호, 봉래호, 풍악호, 설봉호였다. 금강산의 4계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적용된 숙소

바지선 위에 호텔을 만든 해금강호텔. 세계최초의 플로팅호텔이다.

바지선 위에 호텔을 만든 해금강호텔. 세계최초의 플로팅호텔이다.

북한의 서커스 공연장. 외부를 덮은 막과 내부를 지지하는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의 서커스 공연장. 외부를 덮은 막과 내부를 지지하는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의 냉면 전문 음식점 옥류관의 금강산 분점 / 현대아산 제공

평양의 냉면 전문 음식점 옥류관의 금강산 분점 / 현대아산 제공

초기 숙소로 이용된 해금강호텔은 바지선 위에 호텔을 건축한 세계최초의 플로팅호텔이었다. 7층, 160실 규모로 건조 당시 세계적 이슈가 됐다. 인프라가 없었던 초기 금강산관광에 전력, 용수, 오수처리 등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해금강호텔은 유용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엔진소음, 진동과 흔들림에 의한 뱃멀미로 금강산호텔, 외금강호텔이 건립된 후에는 선호되는 숙소는 아니었다.

온정각은 관광객의 휴게시설로 1999년 2월 개관했다. 온정각에는 식당, 판매점이 있었다. 짙은 붉은색 계통의 지붕에 외장재는 적삼목을 사용했다. 현대그룹은 금강산 특성을 고려해 시설들을 저층으로 건립하고 붉은색의 경사지붕, 외장은 목재를 사용한다는 기준을 마련했다. 온정각 건너편에는 동관을 2005년 추가로 개관했다. 기존 온정각은 1층이었으나 동관은 2층으로 건축됐다.

문화회관은 북한의 서커스 공연을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스페이스 프레임과 막구조로 건립됐다. 막구조는 2002년 월드컵경기장을 건축하면서 국내에 많이 도입된 구조로 1998년까지는 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구조에 비해 고가였다. 하지만 기둥이 없는 큰 공간을 짧은 기간에 건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99년 11월에는 금강산온천장이 준공됐다. 평화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금강산 온천은 400년 전에 발견됐으며, 금강산에서 유일한 온천이라고 한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욕탕을 지어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는 구조로 돼 있다고 한다. 현대아산은 온정각에서 금강산여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온천장을 건설했다. 기존 북한의 온천장에서 배관을 해 온천수를 공급했으며, 동시에 10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금강산은 눈이 자주 오는 지역으로 노천탕에서 눈을 맞으며 온천욕을 즐길 때가 가장 좋았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금강산에서 유일한 온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욕탕을 지어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는 구조로 돼 있다.

금강산에서 유일한 온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욕탕을 지어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는 구조로 돼 있다.

저렴한 숙소확보도 필요했다. 북한이 금강산관광을 위해 1981년 건설한 금강산여관을 임대해 2003년 6월부터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금강산여관은 본관(12층 객실 167개실)과 부속동 3개동(봉래동, 풍악동, 설봉동)으로 구성돼 있었다. 부속동을 포함하면 객실수가 총 219개였다. 금강산여관의 리모델링 공사는 북한의 건축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남한에서는 북한의 철근 콘크리트구조 건축기술 수준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금강산여관 리모델링을 위해 건물을 조사한 결과,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금강산여관은 착공 1년 만인 2004년 7월 개관했다. 리모델링은 구조체만 남겨두고 구조보강을 비롯해 전기, 냉난방 등 신축에 가까운 규모로 시행했다. 공사는 북한 인력을 이용해 진행했다. 이들은 금강산 외 지역의 청년들로 남측 기술자들이 기술을 가르치면서 공사를 했다. 금강산여관은 이후 금강산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기에는 식당시설도 없어 관광객은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해야 했다. 이후 온정각, 해상호텔 등에 식당을 만들면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특히 금강산 옥류관은 평양의 냉면 전문 음식점 옥류관의 금강산 분점으로 2005년 8월 개관했다. 북한의 백두산 건축연구원이 기본 계획설계를 하고 남한의 건축사사무소에서 실시설계를 했다. 옥류관은 평양과 같이 한옥지붕을 가진 절충형의 건물이었다. 내부에는 북한의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가 설치돼 있었다. 평양 옥류관의 요리사가 파견돼 평양과 동일한 메뉴(냉면·온반 등)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금강산에는 패밀리마트(현재 CU)가 있었다. 2002년 11월에 온정각과 금강빌리지에 처음 문을 열었고,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 전까지 3개 매장을 운영했다. 패밀리마트는 한때 평양진출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산가족면회소

금강산에 마련된 이산가족면회소. 금강산 온정리 지역에 12층 규모로 건립됐다. / 현대아산 제공

금강산에 마련된 이산가족면회소. 금강산 온정리 지역에 12층 규모로 건립됐다. / 현대아산 제공

금강산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총 22번의 대면상봉 중 4번을 제외하고 모두 금강산에서 이루어졌다. 이산가족면회소는 금강산 온정리 지역에 12층 규모로 건립됐다. 면회소동(12층)과 면회소 사무소동(3층) 2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회소동 1~2층엔 600명을 수용하는 행사장과 회의실, 편의시설 등이 있고, 3~4층에 호텔 구조 78실, 5~12층에 콘도 구조 128실 등 총 206실의 객실에 최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2005년 착공해 2008년 준공했다. 사업비는 54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남북협력기금으로 충당했다. 2018년까지 총 4차례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온정리인민병원과 금강산영농장

금강산에서는 남북의료협력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6년 북한은 현대아산을 통해 금강산 온정리인민병원 개·보수 지원을 요청했다. 온정리인민병원은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이 있었다. 주민 8700명을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나, 시설이 열악했다. 보건복지부는 산하단체인 국제의료보건재단을 통해 건물의 단열, 난방 등을 개·보수하고, 각종 의료시설도 지원했다. 북한 환자의 진료와 치료는 남한 의사와 북한 의사가 함께했다. 특히 산부인과 치료, 안과 치료(백내장 수술) 등에 주민의 호응이 컸다고 한다.

현대는 관광에 사용되는 식자재 중 농산물을 금강산 현지에서 생산해 조달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금강산관광 시 식자재를 모두 해상으로 운송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신선도 유지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9년 현대는 북한의 금강총회사와 협의해 3만평(9만9174㎡) 규모의 온실을 설치했다. 최초의 농산물 납품은 2000년 3월 이루어졌다. 농업기술 전수를 위해 남한의 농업전문가도 파견했다. 그러나 농작물 생산과 납품은 금강산관광지역과 영농장이 5㎞ 정도 거리임에도 남한 인원이 방문할 수 없었다. 전화통화도 불가능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땅이 척박하고 출하 시 수량과 품질검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적정 품질과 수량의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북한은 농작물을 현대에 납품할 때 이것을 수출로 간주해 검역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그룹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 금강산관광사업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금강산관광사업은 2003년 육로관광이 시작된 후 2005년부터 흑자를 기록했으며, 2007년에는 162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2008년 8월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기 전 누적 관광객은 거의 200만명에 달했다. 2008년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10년 내에 투자비 회수를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금강산관광 중단은 안타까움이 크다.

산허리에 안개가 자욱한 금강산.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될 수 있으면 완행열차를 타고 철원을 거쳐 설레는 마음으로.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변상욱 건축사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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