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약자와 함께한 <내 친구 정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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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끝나자 백기완 선생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향년 88세, 군부독재에 맞서던 ‘재야’ 운동권의 상징인 고인의 부고 소식은 현대사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당시 무력한 야당을 대신했던 존재가 ‘재야’운동권이었다. 탄압을 감내하며 투쟁을 벌였던 이들은 1987년 6월항쟁 후 정당 정치인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로 분화돼갔다.

다큐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 시네마달

다큐 「내 친구 정일우」 포스터 / 시네마달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늘 격렬한 논쟁 대상이다. 진영대립에 갇혀 세대를 넘어선 객관적 평가가 정립되기 힘들다. 특히 재야운동권 인사들의 경우 사회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조명 기회가 드물다. 그래도 어쩌면 백기완 선생은 추모 차원에서 전기영화가 시도될지 모르지만, 생전에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고(故) 정일우 신부 전기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특별한 사례다.

백기완 선생이 당대 주요 사회적 의제에 ‘올 라운더(all-rounder)’라면, 정일우 신부의 활동 분야는 빈민운동에 집중된다. 같은 시대에 활약했지만 겹치는 동선은 적다. 하지만 야만의 시절, 개인 안위를 포기함은 물론 소외되고 억울한 이들 삶으로 자신을 동화시킨 예시로 둘의 일생은 닮은꼴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거리와 현장을 지켰다는 점 또한 같다. 그래서 백기완 선생 전기영화가 시도된다면 그 선례로서 이 영화를 추천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존 빈센트 데일리 신부는 1972년 서강대 교편을 잡던 중 제자들이 유신에 항거하다 잡혀가자 상복을 입고 피켓을 든 채 명동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이를 계기로 대학을 나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던 신부는 독재정권의 개발 논리에 기반을 둔 강제개발에 항거하며 도시빈민의 삶을 시작한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효시인 <상계동 올림픽> 등에서 파란 눈의 등장인물이 바로 정일우 신부다. 철거용역과 공권력에 맞서 맨 앞줄에서 싸우다 함께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빈민공동체 건설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사업으로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기도 했다.

정일우 신부는 1998년부터 충북 괴산에서 농촌사목에 힘 쏟다 2014년에 노환으로 별세한다. 고인과 오랜 지우였던 김동원 감독은 어찌 보면 <상계동 올림픽>의 후일담과 같은 작품을 2017년에 선보인다. 영화는 고인의 드라마틱한 삶 소개를 너머 당시 한국사회 풍경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이들의 상황을 조명한다. 박제된 ‘성자’가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술도 잘 마시고 욕도 잘하던 신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영화는 현재 넷플릭스 스트리밍과 네이버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로 볼 수 있다)

역사인물 전기영화는 한국에서는 고난이도 작업이지만 후속 세대에 참고가 될 수 있게 활성화돼야 할 과제다. 고(故) 노회찬 의원의 전기 다큐 영화가 올해 선보일 예정이기도 한 바, 아무쪼록 다음 세대가 시대와 함께한 사회운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온전히 기억하는 방향으로 관련 작품들이 만들어지길 기원한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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