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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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러 온 9명에게 강요된 침묵

마시멜로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마시멜로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늘 이맘때면 다른 내가 되리라 마음먹곤 하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단단히 각오했다 한들 끝까지 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괜히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현대인은 대개 타인에게 자신의 변신을 위임한다. 적당한 돈만 지불하면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당신이 원하는 변신을 강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니까.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의 무대인 ‘평온의 집’ 또한 그런 사람들의 바람과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사업 아이템 중 하나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건강휴양지로 이름을 알려가는 이곳에서 열흘간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한다면 이제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의 짐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평온의 집이 준비한 열흘은 명상, 요가, 태극권, 마사지, 상담 등의 일과로 꽉 채워져 있다. 반면 스마트폰을 비롯한 외부와의 통로는 일절 차단된다. 맞춤형 식단이 제공되는 만큼 당연히 알코올도 금물. 그런 열흘간의 금욕 생활을 스스로 선택한 9명은 모두가 각자 원하는 바를 얻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 기대는 첫날부터 완전히 무너진다.

처음 9명의 손님에게 강요되는 것은 침묵이다. 그것도 가족 단위, 부부끼리 온 일행 사이에서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강력한 묵언 수행은 무려 닷새나 계속돼야 한단다. 더욱이 몰래 챙겨온 와인을 휴양소 측이 멋대로 가방을 뒤져 압수하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소요는 금세 수습되고 평온의 집과 손님 간의 대결로 치달을 것이라 생각했던 독자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간다. 오히려 그 이후부터는 침묵의 시간을 빌려 9명 각자의 상처를 세심하게 더듬으며 9개의 드라마를 쌓아간다.

중년의 로맨스 소설가 프랜시스는 최근 은퇴를 고려 중이다. 그러나 창작의 고통 정도로 생각했던 상처는 실은 사기 연애로 돈과 마음을 모두 잃은 진짜 아픔을 향한다. 갑작스러운 이혼에 당황하며 마음을 추스르기 바빠 보였던 토니에겐 왕년 스포츠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과거가 소환되면서 그의 인생에 새겨진 후회의 기억을 재차 소환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고 모인 세 가족에게 죽음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지는 그 죽음의 진실은 이들 각자가 감춘 슬픔에 정교하게 다가선다. 그러니 어쩌면 이들 9명에게 강요된 침묵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맞닥뜨리는 기회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만큼 이들 하나하나의 드라마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데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침잠하는 덕에 그 깊이 또한 상당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불온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고개를 든다. 이곳의 독재자처럼 군림하며 이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비뚤어진 사명감으로 무장한 누군가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깊이를 더해갈수록 서스펜스는 언제라도 거기에 더 큰 상처를 낼 준비가 돼 있는 듯 보인다. 이윽고 중반 이후, 이용자들의 동의 없이 환각 치료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아슬아슬 유지되던 균형에 본격적으로 균열이 일면서 이들 9명을 거침없이 몰아붙인다. 재미있는 것은 끝내 이들을 연대케 하는 불가해한 상황들이 진중한 드라마와 직조되면서 스릴은 점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배가한다는 점이다. 변화를 미끼로 내세운 평온의 집의 실상만큼이나 드라마와 스릴러가 서로를 겨누고 재차 뒷받침하면서 결말까지 예상치 못한 변신이 연신 휘몰아친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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