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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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기 위해 사는 인간들의 작태

톨스토이의 한 우화에 한없는 욕심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는 어리석은 사내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걸은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말에 갈증과 피로를 무릅쓰다 토지는 고사하고 목숨조차 건사하지 못한다. 훨씬 더 우려스러운 현상은 욕망투성이 인간들이 함께 모여 살 때 발생한다. 오죽하면 홉스가 인류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 정의했을까. 인간의 본성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순자뿐 아니라 마르크스 또한 인간의 본바탕을 불신한다. 그의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은 제한된 자원을 소수가 독과점하는 데 따른 구조적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명했지 않은가.

<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 한국어판 표지 / 불새

<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 한국어판 표지 / 불새

한 SF작가가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의 불행은 제한된 자원 탓일까? 만약 누구나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면 인간은 덜 이기적이 될까?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생계에 아무 지장이 없다면 훈족은 시베리아를 건너 게르만족을 덮치지 않았고, 게르만족 또한 로마제국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을까? 누구나 배를 곯지 않게 무상으로 의식주가 제공된다면 인간은 개인적 심성의 차가 어떻든 간에 덜 포악해지고 보다 너그러워질까? 그 결과 인간이 인간의 비위를 맞추거나 신체 자유의 제약을 감수하는 노예제나 카스트제도는 절대 등장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필립 호세 파머의 <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1971년)는 앞의 질문에 지극히 회의적이다.

<리버월드 시리즈>의 첫 편인 이 장편은 위대했든 보잘것없든 인류 역사상 이제까지 태어났던 모든 이들이 죄다 한꺼번에 동시에 환생한 외계행성 ‘리버월드’를 무대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끝없이 되묻는다. 선사시대 혈거인부터 서기 2008년의 현대인까지 모든 호모사피엔스가 리버월드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하지만, 점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본성을 드러낸다. 저마다 깨어나면서부터 휴대하게 된 수수께끼의 용기(容器)에서 끊임없이 음식과 옷을 얻는다. 설사 살해당한다 한들 이내 이 세계 어딘가에서 부활한다. 따라서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은 의미가 없어지고 대신 어떻게 사느냐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진다.

어느덧 사람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노예로 삼으며 심지어 살해한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부각시키려 하거나 심지어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다. 리버월드에서 사람들이 가장 따분해하다 못해 힘들어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이들과 동등하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세계상이 어찌나 리얼한지 그동안 유토피아 작가들이 그렸던 자기충족적인 공동체 신화는 그야말로 환상처럼 보인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과연 집단이 호의적으로 지켜줄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혹을 제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관해 되돌아보게 한다. 아쉬울 게 없는데도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지옥도라니 부활이나 고생하지 않아도 얻는 무상의 의식주가 무슨 축복이겠는가. 정말 인류가 어떤 제약도 없이 자유로운 상태에 놓인다면 이들은 무질서한 야만상태로 돌아갈까? 리버월드에서 인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실망스러운 작태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자화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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