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아카이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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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까지 한국영화 중 원본이 소실된 게 적지 않다. 문화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가치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영화는 곧 필름이었다. 사라진 필름은 재활용되거나, 녹여서 은단으로 만들거나, 밀짚모자 띠로 장식되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한국영화의 고전 상당수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채널에서 공개된 1958년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채널에서 공개된 1958년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최신작과 나란히 관객의 관심을 끄는 건 고전영화 보정과 복원 상영이다. 20세기 초 명작들이 개인수집가 창고나 공공 기록보관소에서 먼지를 털고 빛을 쪼인 후 새 생명을 얻는다. 여기저기 쪼개져 있던 판본이 통합되어 ‘디렉터스 컷’, ‘완전판’이라는 칭호 속에 재발견된다. 길게는 영화 한편당 10년이 걸린다는 복원 과정을 거쳐 세계영화사는 매년 새롭게 갱신된다.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예로, 첫째는 미국 의회도서관이다. 1800년 건립된 이 도서관은 방대한 책과 영상 자료를 스캔본과 PDF, 데이터베이스 등으로 보관한다. 인류가 멸망해도 이곳만 건사되면 세계 재건이 가능하다 할 만큼 10년 이상 된 영화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영화도 매년 추가된다. 둘째는 스발바르제도 국제종자저장고이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이곳은 대재앙이 닥쳤을 때 인류의 생존을 위해 씨앗을 보관한다. 장소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 향후 200년간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까지 고려했다. 모든 비용은 노르웨이 정부가 책임을 진다. ‘국가의 책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서울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있다. 이곳에서 ‘시네마테크’란 이름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발굴 및 복원한다. 또한 온라인 시대에 발맞춰 유튜브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 채널을 열어 190여편의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국내 영화 중 가치 있는 작품들을 선별해 공개 중이다. 모든 게 디지털화된 시대를 살다 보니 불과 수십년 전 자료가 영구적으로 소실된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지만 1990년대 중반 자료조차 사라진 게 적지 않다.

부족한 예산과 발품 팔아 발굴된 영화는 필름을 끼워 맞추고 화학적 처리작업을 거쳐 디지털 버전으로 재탄생한다. 이 아카이브 덕분에 영화인은 물론, 근·현대사 연구자와 문화예술계 작업자들이 톡톡히 덕을 보는 중이다.

놀랍게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티켓>, <길소뜸> 같은 80~90년대 작품도 이 채널이 아니면 일반인이 온전하게 관람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올해 50주기를 맞아 사회적으로 재조명 중인 고(故) 전태일 열사를 담은 1995년 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조차 원본 네가 필름이 유실된 상태라 현재 해당 채널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판본을 관람할 수 있다. 문화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공허한 말의 성찬보다 한국고전영화 발굴 및 복원 환경에 대한 투자가 절실한 이유다. 기록 아카이브의 가치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그 효용이 더 커진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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