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수명연장과 삶의 질을 둘러싼 잔인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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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삶이라면 ‘수명연장’이란 단어는 뉴스에서나 봄 직했다. 수명연장을 돕는 단백질을 찾아 노화의 해법을 찾았다거나, 수명연장으로 노년의 라이프가 중요해졌다는 소식에서나 듣는 낱말이다. ‘삶의 질’에 관해 고민하는 건 내가 어떤 삶을 꿈꾸는지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과 맞닿았을 거다. 워라밸을 꿈꾸거나, 삶의 가치를 고민하거나, 좀 더 높은 경제 수준을 누릴 때 등장했을 단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반면 암환자들에게 ‘수명연장’과 ‘삶의 질’이란 단어는 다르게 활용된다. “수명연장을 선택하시겠어요, 아니면 삶의 질을 선택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아내가 항암을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고 조혈모세포 이식에 들어가기 전, 주치의가 면담을 좀 하잔다. 치료의 방향을 공유하는 만남이었다. 주치의가 내게 물었다. 수명연장과 삶의 질 중 하나를 고르란다.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지만 난 보호자였고 무조건 환자를 살리는 게 최우선 가치였다. 당연히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니 수명이 중요했다. “당연히 수명연장이죠.”

여기서 수명연장은 ‘좀 더 살아보겠다’라는, 생존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30대 여성이 ‘수명연장’이란 단어를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반가울 리 없다. 주치의도 내 선택에 동의했다. “환자가 아직 젊으니 수명연장이 더 중요하죠. 대신 삶의 질은 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며 이식 전 처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했다.

수명? 삶의 질? 참 무서운 선택

핵심은 이랬다. 환자가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 중에 고위험군에 속하니 이식편대숙주병을 유도하는 쪽으로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약물치료 외에 전신 방사선을 3회 추가한다고 했다. 숙주병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이식 후 수혈된 림프구가 면역 기능이 저하된 숙주, 여기서는 아내의 몸을 공격해서 생기는 병인데 이런 과정에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암세포도 공격한다. 숙주병을 유도하는 이유였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무서운 질문이었다. 수명연장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부터 그랬다. 마치 수명의 불꽃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든다. 연장이란 단어도 그랬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수개월? 수년? 30년? 주치의도 모르고 환자도 모르는 ‘연장’을 두고 우리는 베팅하고 있었다. 삶의 질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고 했을 때,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생각했지만 이거야말로 가볍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삶의 질이 저하한다는 건 숙주병으로 생기는 부작용을 말했다. 숙주병을 유도하지만, 그 숙주병이 어떤 양태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숙주병은 전부 다 오는 거야?” 아내는 숙주병을 두려워했다. 항암치료로 힘겨워하던 어느 날,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숙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봤던 모양이다. 당장의 항암치료보다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숙주병을 더 무서워했다. 약으로 금방 회복하는 병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게 장기나 관절을 공격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어떻게 될까.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하거나 움직이기 힘들어 이전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문에 자존감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내에게 숙주병을 유발하는 쪽으로 치료하기로 했다는 건 보이지 않는 위험과 또 싸우라고 떠민 격이었다.

삶의 질을 포기한다는 건 냉정하게 봤을 때 이런 말과 같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당신 평생 약을 먹으며, 혹은 고통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암을 극복하는 게 더 중요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게 중요하잖아. 그러니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자.”

암세포만 치료해서 될 게 아니다

입원부터 퇴원하는 그 시간 동안 보호자는 환자가 갖고 있는 암이 어떤 병인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면 이 나쁜 것을 몸에서 없앨 수 있는지만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부작용은 으레 치러야 할 통과의례로 생각하며 잘 참고 견디자고 말한다.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환자를 답답해할 수도 있다.

삶의 질과 삶의 양, 어떤 것이 정답일까. 막상 주치의가 던져준 양자택일의 질문에 대답하고 난 뒤부터 고민이 밀려왔다. 내겐 후자만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더 두려워했던 건 혹시 전자였던 게 아니었을까. ‘살아 있다’가 아닌 ‘잘 살아 있다’가 더 중요했던 게 아닐까. 치료의 후유증이나 합병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는 너무나 많다. 그들 중 일부는 우울감과 상실감으로 남은 삶을 살면서 힘들어한다.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배부른 소리라고 무시했던 때가 있었다.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바람만 강조했던 때가 있었다. 죽음으로부터 회생하는 방법이라면 몸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뭐든지 다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명을 건질 순 있겠지만 대신 약해지거나 아픈 몸을 얻는다. 하나는 얻지만 하나는 잃는 셈이다.

암 경험자들의 삶의 질이 망가지는 건 슬프고 불행한 일이다. 사실 병원에 있는 그 누구도 삶의 질과 양 중 어느 한쪽을 양보하는 선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다. 항암치료를 택하거나 항암치료를 택하지 않거나.

암 치료를 옆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건 부작용이나 합병증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부작용이나 합병증은 당연히 오는 것이고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그것들이 내 아내의, 혹은 또 다른 암환자들의 병원 밖 삶에 어떤 피해를 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 불확실함이 싫었다.

최근 치료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논의가 많다. 암세포를 죽이는 데만 집중하는 노력 중에 일부라도 부작용이나 합병증을 미리 줄이는 데 활용하자는 건데, 이런 방법이 얼른 효과를 봐야 내 가족과 누군가의 가족에게 좀 더 좋은 삶의 질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질과 양 중 하나를 양보하라는 질문이 사라지는 건 덤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시리즈 연재를 마칩니다.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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