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했던 삶이라면 ‘수명연장’이란 단어는 뉴스에서나 봄 직했다. 수명연장을 돕는 단백질을 찾아 노화의 해법을 찾았다거나, 수명연장으로 노년의 라이프가 중요해졌다는 소식에서나 듣는 낱말이다. ‘삶의 질’에 관해 고민하는 건 내가 어떤 삶을 꿈꾸는지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과 맞닿았을 거다. 워라밸을 꿈꾸거나, 삶의 가치를 고민하거나, 좀 더 높은 경제 수준을 누릴 때 등장했을 단어다.
반면 암환자들에게 ‘수명연장’과 ‘삶의 질’이란 단어는 다르게 활용된다. “수명연장을 선택하시겠어요, 아니면 삶의 질을 선택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아내가 항암을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고 조혈모세포 이식에 들어가기 전, 주치의가 면담을 좀 하잔다. 치료의 방향을 공유하는 만남이었다. 주치의가 내게 물었다. 수명연장과 삶의 질 중 하나를 고르란다.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지만 난 보호자였고 무조건 환자를 살리는 게 최우선 가치였다. 당연히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니 수명이 중요했다. “당연히 수명연장이죠.”
여기서 수명연장은 ‘좀 더 살아보겠다’라는, 생존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30대 여성이 ‘수명연장’이란 단어를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반가울 리 없다. 주치의도 내 선택에 동의했다. “환자가 아직 젊으니 수명연장이 더 중요하죠. 대신 삶의 질은 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며 이식 전 처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했다.
수명? 삶의 질? 참 무서운 선택
핵심은 이랬다. 환자가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 중에 고위험군에 속하니 이식편대숙주병을 유도하는 쪽으로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약물치료 외에 전신 방사선을 3회 추가한다고 했다. 숙주병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이식 후 수혈된 림프구가 면역 기능이 저하된 숙주, 여기서는 아내의 몸을 공격해서 생기는 병인데 이런 과정에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암세포도 공격한다. 숙주병을 유도하는 이유였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무서운 질문이었다. 수명연장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부터 그랬다. 마치 수명의 불꽃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든다. 연장이란 단어도 그랬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수개월? 수년? 30년? 주치의도 모르고 환자도 모르는 ‘연장’을 두고 우리는 베팅하고 있었다. 삶의 질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고 했을 때,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생각했지만 이거야말로 가볍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삶의 질이 저하한다는 건 숙주병으로 생기는 부작용을 말했다. 숙주병을 유도하지만, 그 숙주병이 어떤 양태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숙주병은 전부 다 오는 거야?” 아내는 숙주병을 두려워했다. 항암치료로 힘겨워하던 어느 날,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숙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봤던 모양이다. 당장의 항암치료보다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숙주병을 더 무서워했다. 약으로 금방 회복하는 병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게 장기나 관절을 공격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어떻게 될까.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하거나 움직이기 힘들어 이전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문에 자존감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내에게 숙주병을 유발하는 쪽으로 치료하기로 했다는 건 보이지 않는 위험과 또 싸우라고 떠민 격이었다.
삶의 질을 포기한다는 건 냉정하게 봤을 때 이런 말과 같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당신 평생 약을 먹으며, 혹은 고통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암을 극복하는 게 더 중요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게 중요하잖아. 그러니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자.”
암세포만 치료해서 될 게 아니다
입원부터 퇴원하는 그 시간 동안 보호자는 환자가 갖고 있는 암이 어떤 병인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면 이 나쁜 것을 몸에서 없앨 수 있는지만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부작용은 으레 치러야 할 통과의례로 생각하며 잘 참고 견디자고 말한다.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환자를 답답해할 수도 있다.
삶의 질과 삶의 양, 어떤 것이 정답일까. 막상 주치의가 던져준 양자택일의 질문에 대답하고 난 뒤부터 고민이 밀려왔다. 내겐 후자만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더 두려워했던 건 혹시 전자였던 게 아니었을까. ‘살아 있다’가 아닌 ‘잘 살아 있다’가 더 중요했던 게 아닐까. 치료의 후유증이나 합병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는 너무나 많다. 그들 중 일부는 우울감과 상실감으로 남은 삶을 살면서 힘들어한다.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배부른 소리라고 무시했던 때가 있었다.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바람만 강조했던 때가 있었다. 죽음으로부터 회생하는 방법이라면 몸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뭐든지 다 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명을 건질 순 있겠지만 대신 약해지거나 아픈 몸을 얻는다. 하나는 얻지만 하나는 잃는 셈이다.
암 경험자들의 삶의 질이 망가지는 건 슬프고 불행한 일이다. 사실 병원에 있는 그 누구도 삶의 질과 양 중 어느 한쪽을 양보하는 선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다. 항암치료를 택하거나 항암치료를 택하지 않거나.
암 치료를 옆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건 부작용이나 합병증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부작용이나 합병증은 당연히 오는 것이고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그것들이 내 아내의, 혹은 또 다른 암환자들의 병원 밖 삶에 어떤 피해를 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 불확실함이 싫었다.
최근 치료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논의가 많다. 암세포를 죽이는 데만 집중하는 노력 중에 일부라도 부작용이나 합병증을 미리 줄이는 데 활용하자는 건데, 이런 방법이 얼른 효과를 봐야 내 가족과 누군가의 가족에게 좀 더 좋은 삶의 질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질과 양 중 하나를 양보하라는 질문이 사라지는 건 덤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시리즈 연재를 마칩니다.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