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와 본격 미스터리의 절묘한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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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아침, 17세 여고생 요리코가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이 근방 성범죄자의 소행으로 단정하려는 가운데 요리코의 아버지 유지만큼은 진범이 따로 있을 것이라 의심한다. 지역 명문고 재학생이었던 요리코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학교 측은 은밀하게 시선을 돌리려 하고, 사건이 지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에까지 이용되려는 양상을 띠면서 경찰의 수사는 왠지 조급하고도 수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리코를 위해> 한국어판 표지 / 모모

<요리코를 위해> 한국어판 표지 / 모모

이윽고 유지는 오래전 읽었던 <야수는 죽어야 한다>라는 추리소설에 자신의 처지를 이입하면서 직접 범인을 찾아 스스로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리고 추리 끝에 진범의 정체를 확신한 유지는 그를 살해하고 곧 자신 역시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이 모든 사건의 내막은 딸을 잃은 유지의 수기 형태로 작품 전반부에 자리한다. 딸에 대한 유지의 사랑과 절절한 고통으로 점철된 이 수기는 만에 하나 자살에 실패했을 때 자신의 범행임을 알리기 위한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다. 실제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치료 중이고, 어딘지 석연찮은 이 사건에 추리소설가이자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개입하면서 차츰 참혹한 진실이 드러난다.

<요리코를 위해>를 쓴 노리즈키 린타로는 작가의 필명이자 그의 대표적인 명탐정 캐릭터의 이름이기도 하다. 엘러리 퀸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맨프레드 리, 프레데릭 대니 두 작가가 엘러리 퀸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작중 탐정의 이름마저 엘러리 퀸으로 명명했던 것과 같은 설정을 도입했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대학 동문이기도 한 아야츠지 유키토, 아비코 다케마루 등과 함께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주역으로 활동한 작가로 정교한 트릭,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플롯을 만드는 데 골몰한 ‘고뇌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 역시 엘러리 퀸을 떠올리는 작풍을 비롯해 특유의 정교한 전개와 그의 깊은 고뇌까지 여실히 느껴진다.

특히 이 작품은 신본격 미스터리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고민의 결과가 전면에 나서면서 더욱 특별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종의 ‘살인게임’에 불과하다는 신본격파를 향한 비판을 넘어서기 위해 그가 참고한 것은 다름 아닌 하드보일드 소설이었다. 로스 맥도널드의 팬이기도 한 노리즈키 린타로는 작중 린타로를 완벽한 하드보일드 탐정으로 분했다. 조이 디비전의 음악이 요리코의 죽음을 쓸쓸히 위무하는 사이 그는 차례로 관련자들을 만나 단서를 얻고 그들의 심중을 캐기 위해 고심한다. 때로는 지역 유지에게 반강제로 끌려가 모종의 압력을 받기도 한다. 냉소적인 독백, 상대의 신경을 긁는 통찰력과 반항적인 말투, 그러면서도 시종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완강함 또한 꼭 하드보일드풍 탐정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유지가 진범을 추적하면서 살해 당시 요리코가 임신 중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린타로가 수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마침내 여러 사람의 가면이 벗겨지고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는 전개는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을 짓누른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들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상황과 범죄를 끌어들이고 일상의 공포와 압제를 한껏 부풀려 그 재료로 삼았다. 요리코의 불행한 생애만큼이나 비극으로 얽힌 인물들 모두가 애초에 덮어두는 게 나았을 진실의 의미를 절감케 하며 하드보일드와 본격 미스터리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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