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의지에도 디테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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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또 의지를 가지래. 나 의지 많은데….”

통화를 끝낸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의지론’을 듣고 웃어넘겼다. 무뚝뚝한 경상도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병을 얻은 뒤 하루 이틀 간격으로 보호자인 내게 전화해 상태를 체크했다. 평소라면 1년 내내 전화하지 않는 분이다. 항암을 할 때도,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고 나서도, 퇴원 후 회복하는 지금도 수화기 너머로 “반드시 낫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의지를 둘러싼 온도차는 환자와 보호자의 갈등 유발 요소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 김정근 기자

의지를 둘러싼 온도차는 환자와 보호자의 갈등 유발 요소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 김정근 기자

의지 강요는 갈등의 씨앗

암을 이기는 과정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건 상식처럼 다뤄진다.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의지’라는 단어를 꺼낸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 보니 우리 집 환자도 그 소리가 질린 것 같았다. “힘내라”, “의지를 잃지 마라”라는 식의 격려가 싫다고 했다. 물론 의지가 몸속에서 어떻게 암을 이길 수 있도록 돕는지 명확히 밝혀진 연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자료들은 있다. 좀 오래된 기사에서 봤는데 원자력의학원이 10년 이상 살고 있는 장기생존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사례가 있다. 장기생존자 10명 중 7명은 암이라고 판정을 들었을 때부터 ‘난 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긍정적인 자세와 의지는 치료에도 선순환을 가져왔다는데, 71.3%가 무조건 담당의사를 믿고 맡겼을 뿐 특별히 자신의 병에 관해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지를 갖고 치료에만 전념하면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거다.

환자는 의지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다. 반대로 보호자는 의지가 회복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의지를 둘러싼 온도차는 갈등 유발 요소다. 우리의 전장은 식탁이었다. 먹는 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세 번에 걸친 항암과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끝내고 난 뒤 병원생활 4개월 반 만에 집에 돌아온 아내는 앙상했다. 평소 몸무게보다 12kg 정도가 줄었다. 얼른 살을 찌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순조롭게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완치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 같았다.

아내는 입맛이 없었다. 이식 후 부작용 중 흔히 겪는 건 입속의 변화다. 일단 구강 건조가 심했다. 맛을 느끼는 정도도 수시로 변했다. 처음에는 그 어떤 맛도 느끼지 못했다. 맛을 느낄 수 있게 된 뒤로는 입속 변덕이 심했다. 어떤 날은 매운맛에 예민했고, 어떤 날은 평범한 단맛을 느끼하게 인지했다.

이런저런 불편함 때문에 몇 숟가락 뜨다가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면 보호자의 속은 타들어 간다. ‘의지를 갖고 약처럼 먹었으면 좋겠는데…’, ‘딱 세 숟가락만 더 먹으면 좋겠는데…’ 속에 삼킨 말들이 쌓이고 쌓여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아내가 갑자기 “나 밥 먹는 거 너무 스트레스니까 따로 먹어”라고 선언했다.

‘적당’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호함

생각해보면 먹는 것 하나로 의지의 크기를 재단한 건 내 실수였다. 치료할 때 본 아내는 누구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보통의 환자들보다 고용량 항암제를 맞았고, 중간에 퇴원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4개월을 무균실에서 보냈다. 그 과정에서 흔한 구토나 설사 없이 모든 치료를 꿋꿋이 버텼던 사람이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고 끙끙 앓기보다는 복도에라도 나가겠다며 간호사의 허락을 구했고, 좁은 실내라도 걸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몸을 움직이려고 한 사람이다. 항암에 두 번이나 실패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앞날을 내려놓기보다는 “다음번은 될 거야”라며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사람이다.

그 무엇보다 독한 외로움과 싸워 이겨낸 사람이다. 무균실이란 작은 공간에서 두꺼운 비닐막에 갇혀 지냈다. 독방에 갇힌 거나 다름없는 그 시간 동안 아내의 세상은 좁은 한평 남짓의 침대 주변이 전부였다. 그곳에서는 오롯이 자기 혼자만의 싸움이 벌어진다. 보호자가 상주할 수 없으니 홀로 있을 때는 누가 물을 떠 줄 수도, 슬플 때 위로해 줄 수도,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다. 그런 혼자만의 싸움을 4개월 동안 했고, 그걸 이겨냈다. 심지어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덤으로 안은 상태였다.

발병한 지 1년이 돼가고, 이식한 지 200일이 지났다. 난 어느 순간부터 내 고집을 꺾고 아내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게 더 나쁘다고 결론 내렸고, 지금까지 큰 탈 없이 회복해가는 아내를 보면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때로는 의지에 대한 온도차를 병원에서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의지를 둘러싼 갈등의 싹 중 하나가 ‘적당’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호함 때문이다. 회복의 필수요소는 식사와 운동이고, 우린 여기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환자가 먹어야 할 적정 식사량이 궁금해서 물어보면 병원에선 이렇게 답을 준다. “적당히 드시면 돼요.” 운동을 얼마나 하는 게 좋은지 물어봐도 이렇게 대답한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적당히 하시면 돼요.”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는 것에 관해 환자와 보호자가 같은 생각을 가질 리 없다. 생각이 달라 생긴 다툼이 환자에게 긍정적일 리 없는 법. 우리도 그랬고 온라인만 뒤져봐도 의지의 크기가 서로 달라 문제인 경우가 많다. 회복하는 과정에 의료진이 명확한 디테일을 던져주면 어떨까 싶다. ‘적당히’라는 단어 대신 회복 단계별로 섭취 칼로리를 알려준다든지, 운동량을 종류별로 측정해 제공해준다면 의지의 크기로 오해할 일은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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