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소비자의 안목’을 길러주는 셀렉트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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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글로벌 패션기업인 폴로 랄프로렌은 미국 뉴욕의 플래그십 스토어에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다. 그런데 의류 매장이 아니라 커피 전문점이었다. 이미 주류 전문점인 ‘폴로 바’와 일반음식점인 ‘RL 레스토랑’을 열었던 사례에 이어 패션과 외식 서비스를 접목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려는 시도였다.

샌프란시스코 마켓 매장에 다양한 의류와 잡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 샌프란시스코 마켓

샌프란시스코 마켓 매장에 다양한 의류와 잡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 샌프란시스코 마켓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시작한 패션기업 클럽 모나코의 뉴욕 매장에 들어서면 커피숍과 꽃집, 서점이 매장 속 매장 형태로 들어서 있다. 또한 자사에서 만든 상품 말고도 샤넬 핸드백, 롤렉스 시계 등 상징적인 명품 브랜드의 상품을 비롯해 일본 디자이너의 양말, 이탈리아 가죽 장인이 만든 액세서리 등 자사의 의류와 어울리는 제품까지 디자이너가 직접 선별해 추천한다. 소비자에게 패션을 한 번에 완성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다.

이탈리아 시각으로 본 아메리칸 캐주얼

패션산업이 다양한 산업을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꾸준히 새로운 원동력을 창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도래, 소비자 구매 패턴의 변화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크게 한 가지로 귀결시킬 수 있다. 바로 ‘패스트 패션’으로 총칭되는 스파(SPA) 브랜드의 파죽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패스트 패션은 최신 유행을 반영해 저가의 의류 상품을 짧은 주기로 대량 생산해서 판매하는 패션 브랜드를 뜻한다. 의류 기획·생산·유통·판매 등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맡아 가격 거품을 없앤 것이 특징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일종의 가치소비를 위해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한 소비자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소비자가 점차 단순히 값이 싼 물건만을 추구하지 않는 소비 패턴을 보이자 여러 패션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품질 개선에도 주력하면서 패션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파 브랜드들의 파상적인 공세에 맞서 여러 패션기업도 잇달아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세컨 브랜드를 내세워 스파 브랜드의 전략에 맞불을 놓기도 했고, 제품 생산 방식을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전환하는 등 투트랙 전략을 진행하면서 시장을 더욱 세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사의 여러 브랜드를 한데 모아 판매하는 공간인 플래그십 스토어나 재고상품을 모아 판매하는 상설 할인매장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바로 소비자의 가치소비 기준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자는 아무리 디자인이 좋은 옷이라도 상품에 얽힌 스토리나 구입할 때의 만족스러운 서비스가 없다면 그저 디자인만 좋은 옷으로 치부한다. 소비자가 가치를 두는 기준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족감을 추구하려는 쪽으로 바뀌면서 단지 가격을 낮추거나 대형매장을 여는 방식만으론 소비자의 지갑을 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편집매장(셀렉트숍)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폴로 랄프로렌과 클럽 모나코 역시 의류 전문점에서 셀렉트숍의 범주로 진화시킨 대표적인 예다. 패션기업들은 새로운 가치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해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무엇보다 산업화된 패션을 다시금 공예의 측면으로 되돌리는 방향을 모색했다.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을 만드는 패션의 본질로 돌아간 것이다. 또 패션 디자이너가 만든 ‘개성’이 소비자에게도 ‘매력’이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소중하게 입을 수 있는 방법도 전했다.

사실 셀렉트숍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이전도 여러 나라의 브랜드 의류를 바이어의 감각적인 능력으로 골라 놓은 매장은 이미 존재했다. 국내의 사정은 어땠을까. 다른 국가들보다 다소 느린 감은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마켓’이 등장하며 국내 셀렉트숍의 새로운 표준이 마련됐다.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이탈리아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메리칸 캐주얼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2006년 서울에서 시작된 남성 패션 전문 셀렉트숍이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한태민 대표는 이탈리아 브랜드 의류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브랜드 상품을 취급하는 한편, 2013년부터 ‘이스트 하버 서플러스’, ‘TBRM’이라는 오리지널 브랜드도 선보이며 선진성과 독창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셀렉트숍을 운영하고 있다.

‘멋진 패션 브랜드 의류’를 넘어

특히 이스트 하버 서플러스는 원단 수급과 패턴 연구, 샘플 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탈리아에서 진행하는 점이 특징이다. 해외 비즈니스를 위한 쇼룸도 이탈리아에 열어놓고 이탈리아 남성복 박람회에 참가해 해외 각국의 셀렉트숍에 입점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만든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제품이 호기심을 끈 데다 디자이너가 직접 판매까지 하는 독특한 운영체제가 해외 바이어의 입맛을 사로잡은 셈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마켓이 국내 셀렉트숍의 표준이 된 이유는 오리지널 상품 라인을 형성했다거나, 정점에 있는 브랜드만 엄선해 판매한 점에 있지 않다. 만약 브랜드만 보고 상품을 구매한다면 셀렉트숍이 아니라 백화점에 가는 것이 소비자 입장에서는 훨씬 유리하다. 그 대신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상품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정보를 함께 제공한다. 나아가 최신 유행에서 벗어나 가까운 미래에 소비자가 요구할 것들을 먼저 제안하는 방식도 주효했다.

다시 말해 ‘멋진 패션 브랜드 의류’를 취급하기보다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한 소비자의 안목’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매장 곳곳에 진열된 상품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상품을 선택해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소비자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구분된 콘셉트에 따라 자신의 안목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목이 왜 중요하냐면,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멋진 자동차를 타며 세련되게 꾸민 집에서 산다고 해도 막상 어떤 게 좋은 것인지 몰라서 고를 수 없는 사람은 막대한 돈을 들여 포장한 가치를 스스로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와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좋은 상품을 고르는 안목은 분명 다르다.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그런 점에서 뛰어난 패션 감각이란 무엇인지, 자신만의 매력을 뽐낼 수 있는 스타일이란 무엇인지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공간을 국내 소비자에게 처음으로 제안했다. 이 점 하나로 그저 ‘맨 처음’이기만 했더라면 의미 없었을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에 자신만의 가치를 더해 각인된 브랜드가 됐다.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도빗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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