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는 누구를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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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 20달러 앞면 도안의 주인공인 앤드루 잭슨은 문제적 인물이다.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쟁영웅으로 미국의 제7대 대통령(1829~1837년)에 올랐지만, 악명 높은 ‘인디언 이주법’으로 10만여 명의 원주민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추방한 장본인이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잭슨은 흑인 노예를 거느렸던 농장주로도 알려져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20달러 앞면 도안을 노예 해방 운동에 투신했던 흑인 여성 해리엇 터브먼으로 교체키로 하고 2020년 이를 공개하기로 했지만 20달러 도안 교체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당선 직후 앤드루 잭슨의 초상화를 백악관 집무실에 걸어놓으며 ‘팬’을 자처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사실상 무산됐기 때문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최근 시위대가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의 잭슨 동상에 쇠줄을 묶고 끌어내리려고 했던 데는 이런 맥락이 담겨 있다.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를 그린 벽화./AP연합뉴스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를 그린 벽화./AP연합뉴스

백인 남성 일색의 보수적인 미국 화폐와 달리, 같은 유가증권인 우표는 진보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미국 우정당국은 1978년부터 ‘블랙 헤리티지’ 시리즈 우표를 선보이고 있다. 위대한 흑인 인물을 기리는 기념 우표다. 시리즈의 첫 주인공이 해리엇 터브먼이었다. 올해 나온 43번째 블랙 헤리티지 주인공은 미국 언론계의 ‘유리천장’을 깬 여성 언론인 그웬 아이필이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마틴 루서킹 목사,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등 남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90년대 말부터 여성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최근 흑인 예술인들을 기리기 위해 발행한 ‘할렘 르네상스’ 기념우표에도 흑인 남녀 예술인이 절반씩 등장했다. 올해 나온 우표 중 백인 남성이 등장하는 우표는 2016년 타계한 ‘골프의 전설’ 아널드 파머 기념우표뿐이다.

우표 수집가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한 것은 단순히 우표로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우표는 인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어떻게 발전하고 고도화되는지를 알려준다. 여성·난민·이주민·성소수자 등의 권리를 옹호하는 우표들이 늘어나고 있다. 캐나다는 지난 2017년 동성결혼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영화 서비스 업체인 HBO 맥스가 ‘노예제도가 있던 미국의 남부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상영 서비스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디즈니플러스가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는 만화영화에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적 묘사가 포함됐다’는 경고 문구를 넣어주는 것, 동화 속 수동적인 공주를 주체적인 공주로 탈바꿈시키는 일련의 흐름도 이런 진보의 결과이자 과정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발행된 우표들도 보수적인 편이었다. 특이할 만한 변화가 시작된 건 불과 1년 전이다. 성평등 관점에서 정부 정책을 개선하는 ‘성별영향평가’가 이뤄지면서 우리 우표에도 여성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나온 현대 한국인물 시리즈에는 1세대 여성 대중가수인 백설희씨가 주인공이 됐다. 여성 독립운동가 기념우표도 등장했다. ‘우표가 누구를 기억하는가’는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고, 미래를 만들어간다.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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