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불충분-논픽션 형식 자체를 픽션의 재료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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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너스레다. 작가는 <소녀불충분>을 쓰기까지 10년이 걸렸으며, 그간 소설이라는 것은 하나도 쓰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물론 10년차 소설가가 내뱉는 비뚤어진 소리는 그간 발표한 작품의 맥과도 상통한다. 이제껏 자신이 쓴 소설들 모두 괴짜 작가 행세를 해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시오 이신 작가의 <소녀불충분> 한국어판 표지 / 학산문화사

니시오 이신 작가의 <소녀불충분> 한국어판 표지 / 학산문화사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데 있다. 소설가가 되기 10년 전 실제 겪은 일이며, 특별한 일 하나 없던 인생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기이한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자신의 괴팍한 성격을 하나둘 나열하기 시작하더니, 진짜로 겪었던 사건으로 들어가기까지 30페이지 가까이 할애하며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사연과 갈등을 저울질한다. 마치 라이트노벨 작가 니시오 이신이 그간 작품에서 보여준 장광설과 너스레, 하염없이 심상을 묘사하다 언어유희로 눙치던 특유의 작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설명하는 듯하다.

그가 겪은 일이란 한 소녀에 관한 사건이다. 자전거로 등교하던 중 휴대용 게임기에 집중하며 길을 걷던 두 아이 가운데 한 명이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목격한다. 앞서가던 아이는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기묘한 것은 그다음이다. 뒤따라오던 아이는 친구가 죽은 것을 바라보다 다시금 손에 들고 있던 게임에 집중한다. 잠시 후 게임 전원을 끈 뒤에서야 울면서 친구에게 다가간다. 이를 유일하게 목격한 그에게 소녀의 비통한 외침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게 분명하다.

일주일 후 작가에게도 사고가 닥친다. 달리던 자전거 바퀴에 쇠파이프가 껴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쇠파이프라고 생각했던 물체는 리코더였고, 이 사고를 실행한 건 트럭 사고 당시 목격했던 그 소녀였다. 심지어 소녀는 쓰러진 그의 열쇠를 훔쳐 집에 잠입해 그를 협박·유괴하고 자신의 집에 감금한다. 일주일간의 감금 생활은 그의 말마따나 ‘자발적 감금’에 가까울 만큼 기묘한 줄다리기로 이어지다 마침내 소녀의 기구한 사연과 비참한 속내를 드러내며 막을 내린다. 결론만 말하자면, 소녀는 처음부터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니었을 뿐이다.

수기 형식으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면서도 시시때때로 강조한다. 어쩌면 ‘그 일을 소설처럼 연출해서 그 아이를 허구의 세계에 묶어버리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야 작가의 계획과 더불어 이 ‘소설’의 정체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10년간 소설가로서 쌓아왔던 경력 전체를 그럴듯한 토대로 구축한 이 실험을 통해 독자를 더욱 리얼한 세계로 초대하고 싶었을 뿐이다.

애초에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줄거리도 없고, 기승전결이나 반전, 세심한 결말도 기대하지 말라’고 재차 강조함으로써 그 토대는 더욱 리얼해진다. 온갖 터무니없는 이야기들 또한 읽는 내내 ‘사실’로 수렴된다. 논픽션 형식을 빌려 그려낸 픽션이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을 품게 만들면서, 실은 논픽션이라는 형식 그 자체를 픽션의 재료로 삼아 독자를 기만했던 것이다. 독자적인 책 한 권 안에 자신의 10년치 세계를 모두 활용하며 픽션과 현실의 경계까지 넘나든 실로 독특한 작품이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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