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21세기 과학소설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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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K. 제미신의 <오벨리스크의 문>은 <부서진 대지> 3부작의 두 번째 권으로 21세기 현대 SF문학이 나아갈 바에 대한 힌트를 준다. SF는 과학기술 문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개인과 사회의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끌어안는다. 그런데 이런 통찰을 한층 다듬자면 첨단 과학기술 동향을 늘 꿰뚫으며,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로 이제 부족하지 않을까. 과학소설은 더 이상 특정 독자들을 위한 ‘경이의 문학’에 그치지 않는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각국의 SF영화들은 십중팔구 그 영감의 원천이 과학소설이다. 더구나 SF소설 또한 대중성 확보에 갈수록 성공하고 있다. SF소설의 능력치가 돌연 일취월장해서라기보다 독자들을 에워싼 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SF적인 비전(우울하든 행복하든 간에)에 근접하기 때문이리라. 요는 소수정예(?) 독자를 위해 과학소설을 쓰던 시절은 끝났다 이 말이다. 새 시대에 맞는 과학소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제미신의 소설이 한 예다.

한때 과학소설은 일반 순문학에 비해 인간성 탐구나 독자와의 감성적 교감에 서투르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영미 과학소설계에 불어 닥친 뉴웨이브 운동 이래 과학소설은 좌우로 시야를 넓히는데 그치지 않고 위아래로 깊이를 더해왔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독자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 현실과학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을 설파하는 데 합리적 통찰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적 영감이 필요하다. 과학소설의 문학성 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제 더더욱 그러한 결을 갈고닦아야 하지 않을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환경보호와 인종차별 철폐란 보편적인 문제 제기를, 무엇보다 인간 중심(다시 말해 독자 중심)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SF 판타지다. 과학기술 남용으로 달이 제 궤도에서 벗어날 만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인류를 ‘가이아’ 지구는 수만 년 동안 걸핏하면 요동치는 지각변동으로 응징한다. 이러한 지각운동을 지엽적이나마 달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은 보통사람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라 핍박받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들의 호칭도 원래 오로진이지만 로가라는 멸칭으로 비하되기 일쑤다, 흑인을 ‘깜둥이’라 부르듯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은 소수 분파를 왕따시켜 분풀이해야만 속이 시원한 것일까. 보통 인간들의 오로진 박해는 흑인여성 작가 제미신의 눈에 비친 인종차별에 대한 또 다른 비유다.

작가는 희망도 꺼내 든다. 오로진을 부려먹다 통제에 벗어나면 임의로 척살할 권리가 주어진 수호자 중 한 명인 샤파는 오로진인 에쑨과 그의 딸 나쑨을 사랑한다. 교조적으로 에쑨을 키우다 의절당한 샤파는 나쑨의 무조건적인 신뢰에 감동해 수호자의 의무를 내던지기에 이른다. 이제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나쑨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수호자로서의 능력을 구현해주는, 목에 삽입된 장치가 아무리 고통을 주며 나쑨을 죽이라 교사한들 샤파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나쑨의 샤파에 대한 믿음 또한 흔들리지 않는다.

<오벨리스크의 문>의 진정한 힘은 유별난 아이디어나 사회과학적인 통찰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감탄하리만큼 정교하고 미묘하게 그려내는 데 있다. 생존을 위해 아비규환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외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켜낸다. 과학의 오·남용으로 자멸하는 세상을 그린 이야기들은 많지만, 독자의 마음을 이러한 지점까지 이끄는 예는 극히 드물다. 21세기 SF가 성취해야 할 개념적 돌파는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이 아닐까.

N. K. 제미신의 <오벨리스크의 문> 한국어판 표지 / 황금가지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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