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억 가지 신의 이름>과 <미시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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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우주에 대한 자유분방한 상상력

과학소설은 설사 낯선 세계관과 배경을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희로애락의 인간사와 부조리한 세상사를 가감 없이 담을 만큼 기존 순문학과 다를 바 없는 보편적 공감을 자아낸다. 심지어 순문학은 좀체 엄두를 내지 못할 소재까지 넘나든다. 우주의 성질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 의미는 과학소설만의 전매특허 분야라고나 할까. 아서 C. 클라크의 1953년 작 <90억 가지 신의 이름>과 류츠신의 1987년 작 <미시세계의 끝>이 전형적인 예다. 두 단편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할 법한 힌트에 접근하게 되면 얼마나 경이로운 현상이 벌어질지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두 단편이 각각 실린 <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과 <미래세계 구출> 표지/ 자음과모음, 오멜라스

두 단편이 각각 실린 과 <미래세계 구출> 표지/ 자음과모음, 오멜라스

<90억 가지 신의 이름>은 최첨단컴퓨터로 세상에 존재할 법한 신의 온갖 이름 90억 개를 한데 조합한 결과 돌연 우주가 멸망하는 이야기다. ‘신의 이름’을 조합하는 주체는 티베트 라마승들로 이들은 이미 지난 300년간 해당 목록을 작성해왔다. 이들은 자기네가 고안한 문자로 있을 법한 모든 신의 이름을 아홉 글자 이내로 표시해 기록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 대역사(大力事)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다간 무려 1만5000년이나 걸린다는 점이다. 이 방대한 시간의 강을 단숨에 건너고자 라마승들은 서양에서 대용량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빌린다. 얼핏 황당한 시도 같지만, 첨단 연산장치까지 동원한 이상 나름 실용적이다. 있을 법한 모든 글자의 조합 중에 진짜 신의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단원에서 라마사원을 떠나던 서양 엔지니어들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라마승들이 드디어 신의 진정한 이름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일까?

<미시세계의 끝>은 현대물리학에서 가장 작은 입자로 여기는 쿼크를 만일 쪼갤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의문에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두 명이 배석한 가운데 중국의 실험물리학자들이 전례 없는 슈퍼에너지를 동원해 강제로 쿼크를 쪼갠다(아직 현대기술로는 그럴 만한 기술이 없다). 그러자 밤하늘이 밝은 우윳빛으로 변하고 별들은 검은색이 되어 우리의 친숙한 세계와는 정반대로 흑백이 반전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작품 속 이론물리학자의 해설을 들어보자.

“지구는 둥글어요. 표면의 한 점에서 출발해 앞으로 계속 걸으면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우리는 우주의 시공이 어떤 모양인지 알았습니다. 아주 비슷해요. 미시세계 심층으로 계속 걷다 끝에 이르면 거시세계로 돌아옵니다. 가속기가 조금 전 물질의 가장 작은 구조를 뚫고 갔기에 그 힘이 가장 큰 구조에 작용해 우주가 거꾸로 도는 겁니다.”(국내 번역판 187쪽)

이 괴현상 탓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해결방법은 다시 한 번 쿼크를 쪼개는 것뿐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해석하는 이론을 각기 제시하나 두 이론(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한데 어울리지 못한다(두 방정식을 하나로 연결하면 값이 무한대가 된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류츠신의 아이디어도 일리가 있다. 하나의 우주가 미시와 거시라 해서 어찌 각기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겠는가.

이상 두 작품이 내놓은 답이 정답은 아닐 터다. 하지만 과학소설이 아니라면 내놓을 수 없는 답이다. SF를 제대로 고루 맛보고 싶다면 이런 작품들도 일독을 권한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될 테니.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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