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다는 의미 <시련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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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국가는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강도 높은 물리적 거리 두기 정책을 폈다. 의료·운송과 같은 필수 업종의 인력을 제외한 사람들이 짧게는 2~3주일, 길게는 몇 개월 가까이 집에서 머무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상의 봉쇄령이라 할 수 있지만 프랑스 같은 일부 국가처럼 자택 주변에서의 조깅이나 반려동물과의 산책은 예외적으로 허용한 경우도 있다. 타인을 만나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과도 물리적으로 2m 정도 간격을 두고 걷는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정말 ‘거리를 걷는 것’ 자체만 허용한 셈이다.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작품 <Nummer acht>(위)와 <Nummer twaalf> /필자 제공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작품 (위)와 /필자 제공

국내에서도 자체적인 거리 두기가 가능한 걷기나 산행 등에 새롭게 관심을 갖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는 듯하다. 혼자 걷고 달리는 행위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을 이토록 드러낸 때가 있었을까? ‘혼자일 것’이라는 조건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산책 루트를 따라 걷는 이들은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걷던 자신을 그리워하리라.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 혼자인 것의 의미를 확인해볼 수 있는 전시가 때마침 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영상미와 특유의 사운드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휘도 판 데어 베르베의 개인전 <시련과 부활>이다.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의 국내 첫 전시로 오는 7월 11일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15년에 달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이번 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10여 분 동안 꽁꽁 얼어붙은 바다에서 하염없이 걷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 <Nummer acht(작품 8번)>이겠다. 거대한 쇄빙선이 작가의 뒤에서 직접 얼음을 깨며 따라오는 모습은 단순히 위험하거나 웅장하다는 감상으로는 충분치 않다. 끝없이 펼쳐진 핀란드 연안 얼음바다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작가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따라오는 쇄빙선은 구원일까, 위험일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규칙화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체스로 시작해서 웅장한 자연을 마주하기까지 계속 걸어가는 작가의 모습을 기록한 작품 <Nummer twaalf(작품 12번)>는 가능하다면 꼭 끝까지 감상하기 바란다.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40분 길이의 4K 영상이 보여주는 자연 속에서 작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뉴욕의 체스클럽을 시작으로 거대한 산과 초원을 가로질러 외딴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혼자 걷고 또 걷는다. 작가는 체스 말의 움직임이 곧 피아노의 타건으로 이어지는 체스피아노를 직접 제작해 배경음악에 활용했다. 작가의 고독한 여정 속에 이따금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번잡한 인간사회의 때를 아직 벗지 못한 작가의 번뇌일 수도, 혼자가 되고 만 작가의 인간사회로의 향수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자신의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12시간 만에 마라톤 정규 거리의 2.5배에 달하는 거리를 완주해 낸 <Effugio c(도피 c)>는 물리적 거리 두기로 인해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작금의 현실과 비교해 감상해 봐도 좋을 작품이다.

<정필주 예문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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