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학술원장 김병기 “건국 후 최대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생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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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나라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작지만 큰’ 보도가 하나 있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학생 40명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소식이다. 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 무슨 뉴스가 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장학금은 좀 다르다. 기존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주는 장학금은 독립운동가의 ‘서훈 여부’와 ‘훈격’ 등을 따졌지만 이 장학금은 이 모두를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훈을 받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후손도 선발됐다. 특히 처음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장학생을 선발해 미국·독일·호주는 물론, 러시아·카자흐스탄·쿠바와 같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 정착한 독립운동가 후손까지 포함됐다. 이념이나 국내외 지역, 훈격 등을 따지지 않고 독립운동 그 사실만 따진 것이다. 이는 사실상 건국 이래 최초이고, 장학금액도 역대 최고액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광복회 학술원장 김병기 “건국 후 최대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생 선발”

건국 후 최초·최고 독립운동가 후손 장학사업은 롯데장학재단(이사장 허성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대표상임의장 김홍걸)이 함께 진행했다. 지난 1월 공고를 시작으로 3월 20일까지 전 세계(해외 21명)에서 150여 명이 신청했고, 근 한 달간 심사 끝에 이중 40명을 선발했다. 이 장학생 선발 심사를 맡았던 김병기 광복회 학술원장(67)을 만났다. 그는 증조부(김병학 선생)와 부친(김계업 선생)에 이은 3대 독립운동사 집필 학자다.

3대 독립운동사 집필 학자

-이번 장학생 선발은 국내 최대규모다. 독립운동가 후손 장학사업은 보통 어느 정도인가.

“소규모 장학사업이 여러 개 있다. 장학금액이 많은 것은 200만원 정도이고, 광복회에서 주는 장학금은 500만원으로 가장 크지만 단 한 명만 준다. 이번에 600만원씩 40명에게 주는 장학사업은 역대 최대다. 원래 공고는 30명만 선발한다 했는데 좋은 학생이 너무 많아 롯데장학재단의 용단으로 40명으로 늘렸다. 무엇보다 이번처럼 해외 대사관·공사관·한인회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장학사업을 공지해 응모를 받은 시도는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이 장학생 선발에서 특별한 기준과 특징이 있나.

“보통 장학생 선발은 학계 교수들이 선발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서훈 여부와 훈격이나 성적 등 정형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채점하듯이 기계적으로 선발했다. 그러나 이번 심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직접 참여해 실질적으로 선발했고, 특히 공적이 있음에도 서훈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집중 발굴했다. 이념을 초월해 독립운동을 한 사실 그 자체만 따졌다. 또 직계만 선발하지 않고 외손까지 포함하는 등 그 폭을 넓혔다. 심사위원은 이종찬 우당 이회영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정원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진 김구 선생 장손자, 박도 역사학자 등이 같이했다.”

-이번에 선발된 장학생들을 보면 해외에 정착한 독립운동가 유자녀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어떤 독립운동가 후손들인가.

“해외 독립운동가 유족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해외에 정착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국내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이 많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가 직접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전체 장학생 중 30% 넘게 배정했다. 카자흐스탄에 있던 계봉우 선생은 러시아·만주·상해 임정에서 두루 활동했던 역사학자로 사회주의 국가에 있다가 뒤늦게 서훈을 받았다. 러시아 김경천 장군은 흔히 김일성의 모델로 처형당해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분이다. 1905년 하와이를 거쳐 1921년 쿠바에 정착, 그곳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정에 보내면서 한글 활동을 한 임천택 선생의 손자도 이번에 선발됐다. 임천택 선생의 아들은 쿠바혁명에 주역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선발된 국내 학생으로 인상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장건상 선생의 외증손자가 있다. 장 선생은 임정 외교부장을 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진보운동으로 투옥되는 등 고난을 받다 돌아가신 분이다. 게다가 그 학생의 외조부는 1974년 박정희 정권에서 조작된 인혁당 사건으로 8년을 억울하게 복역했다. 뒤늦게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배상을 받았지만, 정부가 배상금을 잘못 주었다며 도로 환수해 집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다. 인도와 미얀마에서 광복군 활동을 한 한지성(본명 한재수)은 서훈을 받지 못한 유자녀를 장학생으로 뽑았다.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중국의 유명 농업학자가 된 유자명 선생의 외고손도 이번에 발굴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를 사회주의자로 잘못 알아 평가도 늦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사회주의자로 오인했을 정도였다.”

해외 독립운동가 유족 선발은 획기적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 그동안 정부는 독립유공자 후손에게는 직계 한 명만 그것도 2대까지만 연금을 줬다. 수업료 혜택은 줬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에서 이를 3대로 늘렸지만, 여전히 한 명만 주다 보니 외가 쪽 혜택은 거의 전무했다. 게다가 이제는 세월이 흘러 3대(증손)를 넘어 4대(고손)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서훈자가 가장 많은 1890년대 의병투쟁의 경우 이미 3대를 넘어 4대로 넘어왔다. 실제 이번에 장학생 선발에 응모한 후손 상당수가 4대(고손)이다.

김병기 위원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독립운동가 후손 장학생 선발 심사를 하고 있다.

김병기 위원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독립운동가 후손 장학생 선발 심사를 하고 있다.

김 원장은 “의병투쟁을 했던 사람은 대략 15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면서 “이들은 출감 후 일제강점기 36년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기 때문에 가장 고통이 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제는 ‘의병 마누라는 또 의병을 낳는다’, ‘의병 자식은 또 의병이 되기 때문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탄압했다고 한다. 이들 2·3대의 대부분은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가난을 대물림했다.

그는 이번에 독립운동가 3·4대 후손을 심사하면서 ‘3대가 망한다’가 아니라 ‘4대가 망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한다. 김 원장은 “독립운동가 집안은 ‘불령선인’으로 찍혀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떠돌이 생활을 해 자식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면서 “가산을 정리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도 돌아와 보니 재산이 없어 역시 자식교육을 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친일 집안은 해외에 유학하고, 영어를 배워 미군정에 참여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또 고통을 받기도 했다. 앞서 장건상 선생은 본인도 혁신운동으로 고난을 받고 그 후손은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심지어 강일구 선생은 6·25전쟁 직전 보도연맹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대전 산내골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2009년 강 선생은 어렵게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돼 서훈을 받았지만, 그 유족은 난치병을 앓고, 큰딸은 대형마트와 대학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요즘 코로나19로 대학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심사에서 성적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 저소득자를 우선 선발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최근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부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식민지 근대화론자가 제시하는 통계도 오류라고 지적 받았지만 수치로만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역사학자 입장에서 보면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우리 역사의 주체인 우리를 위한 발전이 아니라 식민지 수탈을 위한 발전이었다. 역사학적으로 주체를 잃고 본질을 망각한 이론도 아닌 주장일 뿐이다.”

광복회가 만든 학술원 초대원장에

-지난해가 3·1운동 100주년으로 많은 기념행사를 가졌다. 1년이 지난 지금 좀 썰렁한 느낌이다. 독립운동 관련 행사가 너무 이벤트성으로 치우치지 않나 생각된다. 올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다.

“독립운동 교육·선양에 대한 국가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있게 추진해야 한다. 지난해 100주년이란 의미가 컸다.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기본틀을 만들었는데 점차 희미해져 간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실체화되지 않는다. 희산 할아버지(김 원장의 증조부)가 쓴 <한국독립사>에는 나라를 찾으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썼다. 하나는 논공행상이다. 나라를 찾는 데 공헌한 사람은 포상하고, 반역자는 응징해야 한다. 두 번째가 역사를 바로 써야 한다. 그래야 후손에게 이 정신이 계승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 이 두 개를 다 못 했다.”

김 원장의 증조부 김승학 선생(1881∼1964)은 평북 의주의 유학자 출신으로 서울 한성사범을 나와 신·구 학문을 한 사람이다. 게다가 1910년 만주로 건너가 중국 최초의 군사학교 ‘강무당’에 입교해 문·무를 겸비했다. 이후 서간도에 무기를 도입해 참의부 참의장으로 무장투쟁을 하다 상해로 옮겨 임정 <독립신문> 사장을 지냈다. 해방 후 서울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하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저승에 가서 독립운동가 동지들을 어찌 볼 것인가’라고 질타하는 글을 실었다가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후 부산에 정착해 <한국독립사>(1965)를 유고로 남겼다. 같은 평북 유학자 학맥인 박은식 선생이 나라를 잃은 <한국통사>를 쓰고, 그는 해방이 되면 독립운동사를 쓰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김 원장의 부친 김계업 선생 역시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으로 <한국민족총사고>(1985)를 저술했다. 이는 한문투였던 김승학 선생의 <한국독립사>를 쉬운 한글체로 바꾸고 특히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증보한 것이다. 김 원장은 “인명사전에 2만5000여 명의 독립운동가 명단을 수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서훈된 1만5000여 명보다 1만 명 정도가 많다”고 말했다.

김병기 원장은 전쟁으로 온 가족이 피란 갔던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농경제학과 졸업하고 해운회사에 근무하다 마흔세 살에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가업을 잇기 위해서였다.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2005년 항일무장투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생업을 겸해 공부하다 보니 학위가 늦었다”면서 “늦게 공부해 대학 정교수로 강의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면서 대종교 차원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에 앞장섰다.

김 원장은 부친이 하던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회 이름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사>를 집필했다. 그러니까 증조부와 부친에 이은 3대가 독립운동사를 쓴 것이다. 그는 지난해 광복회에서 만든 학술원에 초대원장으로 초빙됐다. 그는 “우리는 보훈처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만든 60권짜리 대형·학술 중심 독립운동사 총서만 있다”면서 “독립운동사 전체를 아우르면서 대중이 편하게 읽을 한 권짜리 독립운동 통사와 이를 더 쉽게 풀어쓴 청소년 버전 통사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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